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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마라의 최후를 성스럽게 그림 통해 ‘이미지 조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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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08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운명의 그날, 그는 지긋지긋한 피부병 때문에 하루 쉬기로 하고 찬물을 가득 넣은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모르는 젊은 여자가 찾아왔다. 부탁할 것이 있다며 꼭 만나야 한다고 애걸한단다. 보나마나 또 일자리를 구해 달라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한 그는 투덜거리며 욕실로 그 여자를 들어오도록 했다. 그 여자가 미리 준비했던 칼로 그의 가슴을 찔렀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글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26>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혁명가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는 이렇게 죽었다. 그는 안과 의사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40대의 늦은 나이에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었다. 똑똑하고 말 잘하던 그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면서 프랑스 서민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리고 점차 과격한 혁명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각됐다. 혁명의 혼란기에서 그의 인기를 두려워한 반대파가 그를 기소해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 정치계에 극적으로 금의환향했고 이로써 더욱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돌아온 그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반대파를 몰락시키고 실세가 됐다. 그는 “혁명을 위해서라면 귀족 수백 명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해 피에 굶주린 국민의 찬사를 받았다. 그렇게 빛나는 인생의 절정에서 그의 야망과 권력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끝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죽고 나서 마치 예수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를 죽인 여자는 민중의 분노 속에 단두대 위에서 처형됐다. 모든 정치인과 구름같이 모인 사람 속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감동적 추도사가 낭독됐다.

“마라는 예수처럼 민중만을 끝까지 사랑했다. 마라는 예수처럼 기존 권력과 부유층에 대항해 싸웠다.”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은 마라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위대한 사람들만이 묻히는 팡테옹에 묻혔고 그의 무덤에는 ‘여기 민중의 적에 의해 살해된 민중의 친구 잠들다’ 고 적힌 묘비가 세워졌다.

이런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혁명정부는 “그가 프랑스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를 추모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수도 파리의 교회들은 십자가를 치우고 대신 그의 흉상을 세워 그를 추모했다.

마라의 친구이자 유명한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명작 ‘마라의 죽음’을 만든 것도 이때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이 그림 속에서 마라는 실제보다 훨씬 잘생긴 모습이며 전통적 성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예수나 성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의 자세와 빛의 방향은 마치 옛날 성화에서 흔히 보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성화 속 예수가 흔히 그렇듯 그림 속 마라는 보기 좋은 체격이며 몸에는 찔린 상처가 보인다. 앞쪽 위에서부터 빛을 받아 처연하게 빛나는 그의 몸에는 그를 평생 괴롭힌 피부병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라가 왼손으로 잡고 있는 편지에는 혹 암살자를 위해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심지어 오른쪽 탁자 위에 있는 약간의 돈은 마라가 불쌍한 여자를 위해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그림의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 우리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마치 살인 사건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다비드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마라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희생된 예수처럼 위대한 지도자며 순교자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만든 것뿐이다.

영화나 사진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정치 세력들은 이렇게 그림을 통해 마라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그를 순교자로 재창조하려는 과격파의 필사적 노력에도 그가 신처럼 추앙되던 시기는 너무 짧았다. 시간이 지나 마라가 이끌던 공포정치 시대가 끝나자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바뀌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숭배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파리 교회마다 있던 그의 흉상은 모두 철거됐다. 그의 유해마저 팡테옹에서 파내어져 일반 묘지로 이장됐다. 세월은 그를 예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고 지금은 이 그림만 남아 있다.


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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