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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과 섶, 섶코의 각도...한복은 과학입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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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02면

“저는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변화를 안 좋아하죠. 아무리 봐도 우리 옷만큼 예쁜 것이 없는데 왜 변화시켜야 하나요?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이 시대만큼은 전통의 선 자체가 남아 있어줬으면 해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서 전통한복 패션쇼 여는 김혜순씨

김혜순씨가 뉴욕 패션쇼에서 왕비역을 맡은 탤런트 채시라씨에게 활옷을 입혀보고 있다.

2002년 전통한복 연구가 김혜순은 서울 역사박물관 개관과 함께 조선 왕실 복식의 복원을 맡게 됐다. 바람에 날리면 삭아 없어질 만큼 위태로운 상태의 실제 유물을 보러 간 그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기법으로 한 땀 한 땀 짜인,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미학이 고스란히 담긴 최상위 문화의 집결체를 마주했기 때문.

“복식사만 아는 교수가 복원했다면 이런 느낌을 몰랐을 겁니다. 저는 옷을 직접 꾸미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옷감에 담긴 정신을 체험한 감회가 남달랐죠. 손으로 일일이 옛날 기법 그대로 옷감을 짜 재현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7년에 걸쳐 ‘왕의 복식’을 책으로 완성했습니다. 그 책을 접한 메트로폴리탄의 학예사가 지난해 쇼를 제안해 꼬박 1년을 준비했어요. 처음엔 작은 패션쇼로 생각했는데 한식, 화장품, 전통주 등 업계에서 함께하길 자청해 어느새 커다란 국가 행사가 돼버렸습니다. 왕의 행렬을 이끌고 박물관에서 쇼를 연다는 것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 같아요. 앞으로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이 박물관 패션쇼를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젊은 시절 동양화를 수련하던 그는 연기자 출신 한국인형 연구가로 유명한 외삼촌 허영의 권유로 한복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허영은 매장을 열기 전 김혜순을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인이 기모노를 어떻게 다루는지 먼저 보여줬다.
“삼촌이 저를 기모노 매장에 데려가시기에 기모노 구경이나 좀 할까 했었죠. 그런데 매장에 포만 길게 늘어져 있을 뿐 옷은 보이지 않더군요. 한 벌 구경하는 데 20분이 걸렸어요. 꺼내와 무릎 꿇고 옷을 내려놓는 데만 몇 분이 걸릴 정도로 옷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다하는 모습, 삼촌이 제게 보여주시려 한 건 바로 그 정신이었어요. 그들은 쉽게 내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궁금하면 들어오라’는 전략으로 오히려 세계 상권을 끌고 왔죠. 외국 사람이 호텔에 가면 일단 유카타부터 입혀 버리잖아요? 물론 자기들이 그만큼 기모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죠.”

일본인이 기모노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쓰고 원형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변형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나 김혜순은 오히려 시대별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 옷의 형태를 발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저는 한복이 없어질까 봐 걱정이에요. 제 사명이 우리 옷을 남기는 것이라 생각해 저는 퓨전을 안 합니다. 우리 한복만큼 예쁜 패턴을 본 적이 없는데 뭐 하러 퓨전을 합니까. 깃과 섶의 만남, 섶코의 각도, 치마와 저고리의 비례 같은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민족에 가장 어울리게 만들어진 하나의 과학입니다.

전통만 잘 살려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단 얘기예요. 똑같은 그림이나 사진을 봐도 자기 성정에 따라 다 달라 보입니다. 저는 드라마 ‘황진이’를 할 때 미인도를 수백 번 봤어요. 옛것을 자꾸 보면 새로운 것이 나오거든요. 물론 소재에서는 변화도 필요하지만 형태는 바꿀 필요가 없어요. 전통을 자꾸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랬다가도 다시 돌아오죠. 저는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다할 겁니다.”

2006년 그가 의상을 제작한 KBS 드라마 ‘황진이’는 대담한 패턴과 소재, 색감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패션으로서 한복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형태를 변화시키지 않은 전통적 한복임에도 새로운 미의식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기녀 복식을 연구하며 옷 안에 담긴 여인들의 애환과 정서까지 해석해낼 수 있었기 때문.

“입는 사람에게도 공감이 가는 옷을 만들 뿐이에요. 옷을 왜 입나요? 섹시미를 과시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기생 옷을 연구한 것은 여성들이 구속 받고 규제 받던 시대에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 기생이었고 그들이 패션 리더 역할을 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기생은 천민이 아니라 시서화에 능한 예인으로 박학다식한 중인 계급이었고, 남성 가까이에서 중간 역할을 톡톡히 한 영향력 있는 여성들이었죠. 반가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니 규방문화가 엄청나게 발달했고, 여인들이 스스로 디자이너가 돼 옷과 장신구를 지으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냈어요. 유교 사회에서 구속 받던 여인들의 한이 옷에 깃든 것이죠. 특히 저고리의 변화는 시대상을 얘기합니다. 요즘 미니스커트처럼 점점 짧아져 18세기엔 거의 가슴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을 가려주는 가슴 싸개와의 조화가 그렇게 섹시하고 멋스러울 수 없어요. ‘황진이’를 통해 그런 우리 여성의 대담한 멋을 보여주게 되어 너무 행복했고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황진이’에서 보여준 대담한 색감과 파격은 삼촌 허영의 영향이 크다. 전통의 틀 안에서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가 지향한 방향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뉴욕 패션쇼에서 왕비 역할로 런웨이에 서는 탤런트 채시라씨는 일찍부터 이들의 스타일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저는 이미 황진이 이전인 1996년 ‘미망’이라는 시대물에서 빨간 두루마기를 입었어요. 두루마기란 걸 그저 얌전한 색깔로만 알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빨간색을 입어 봤던 충격에 한복이란 것이 전통 속에서도 얼마든지 틀을 깰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허영 선생님과 김혜순 선생님이 함께 만들어주신 옷이었어요.”

김혜순은 왕실과 기녀 복식 외에 우리 저고리 자체의 시대별 변화상에도 정통하다. 2003년과 올해 6월 두 번에 걸쳐 저고리 연구서를 낼 정도로 시대별 저고리 복원과 재현에 심취한 김혜순에게 2005년 파리 프레타포르테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기모노밖에 모르던 프랑스 사람들이 한복에 눈을 맞춘 것.

한국을 방문한 20여 명의 프랑스 디자이너가 김혜순의 저고리 책을 직접 골랐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변형된 것이 아니었다. 김혜순이 복원한 온전한 우리 저고리를 모티브로 그들 나름대로 재해석한 작품을 프레타포르테에 선보이며 저고리 디자인으로 커다란 문을 만들고 그의 저고리를 행사장 한가운데에 전시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들이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고 하는 데 충격을 받은 그는 한복의 우수성을 검증하기 위해 그해 한양대에서 열린 한·일 학술대회에서 ‘최고의 기모노와 최고의 왕비 옷’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때 옷을 다루는 정신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됐어요. 기모노는 창작은 물론 입혀주는 사람도 자격증이 있어야 해요. 옷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죠. 천 조각 하나에 정신을 부여하고 포 하나로 이뤄진 옷에 엄청난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에 비해 한복은 열두 가지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 옷이니 열두 배 많은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지 않겠어요? 문제는 한복을 안 입으려고 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며칠 전 국회방송에서 한류 열풍에 발맞춰 한복의 한류에 대해 얘기해 달라더군요. 우리가 배척하는 마당에 무슨 한류냐고 큰소리치고 왔습니다. 지금 한복은 없어질 위기에 있어요. 결혼할 때도 잠깐 입는다며 빌려 입고 말죠. 일본에서 성인식 날 부모가 기모노를 선물하는 풍토는 잊히기 쉬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나서는 겁니다. 그렇게 반석을 깔아줘야 우리가 나가 한류도 일으킬 수 있겠죠.”

추석이다. 명절이 되면 고이 모셔뒀던 한복을 꺼내 입던 아련한 기억을 뒤로 한 채 불편함을 이유로 점차 한복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 빠르고 편리한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지금, 왜 한복을 입어야 할까?
“한복을 입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어요.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고,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지 않나요? 명절 때 한복을 입는 건 마음가짐의 문제예요. 명절 때만이라도 한복을 입어 마음이 들뜨고, 풍요롭고 넉넉해지면 좋겠다는 겁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것을 고를 필요도 없어요. 어떤 게 예쁜 한복이냐고요? 한복은 갖춰 입으면 다 예쁩니다. 강부자씨가 입는 한복을 보세요. 그저 멋이죠. 입다 보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겁니다.”

얼마 전 신라호텔 뷔페에서 해프닝이 있었듯 한복에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이미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이 같은 한복 하는 사람이라고 저에게까지 사과하더군요. 저는 전혀 미안해할 것 없다고, 한복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남이 봤을 때 보기 좋고, 입고 싶어지는 옷이라면 불편함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90년대부터 인수대비, 천추태후 등 숱한 왕비 역할로 한복과 더불어 살아온 채시라씨는 한복이 풍기는 격을 불편함을 이유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는 연기할 때도 버선, 속바지까지 반드시 갖춰 입습니다. 안 보인다고 속에는 청바지를 입는 배우도 있지만 그 느낌은 천지 차이거든요. 모든 것을 갖춰 입었을 때 그 혼이 들어온 느낌에 위엄이 저절로 나오고 비로소 내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한복이 주는 느낌과 의미란 건 불편함을 넘어서는 차원인 것 같아요.”

96년 드라마 ‘미망’에서 인연을 맺은 이래 김혜순 한복을 15년째 애용하고 있는 채씨는 김혜순 한복의 매력을 심플함만으로도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힘있는 멋으로 꼽았다. “제가 대하드라마 ‘왕과 비’의 인수대비 역으로 연기대상까지 받았는데, 그때 저를 캐스팅하신 정하연 작가님이 ‘미망’에서 흰색 무명한복을 입은 저를 보고 인수대비로 낙점하셨다는 거예요. 아무 군더더기 없는 한복 그 자체만으로도 위엄과 권위를 뿜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선생님만의 능력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올 추석에는 저도 꼭 한복을 입어야겠어요. 애들한테만 입히고 말았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이제부터는 저희도 꼭 입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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