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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1951-),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처럼

중앙일보

입력

포스트-프랑코 시대의 스페인을 보고 싶다면, 단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의 눈으로 현기증날 정도의 빠른 리듬으로 바뀌고 있는 스페인의 내밀한 곳을 체험하고 싶다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찾을 일이다.

그의 영화에는 스페인의 정지된 듯 무심한 겉 풍경이 아니라 핑크 빛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온갖 속 표정들이 숨어 있다. 프랑코 사후의 스페인 문화의 파편들을 짜깁기하는 이 정신없는 공간에서 만감이 교차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두고 새로운 스페인의 멘탈리티(mentality)에 대해 사소설처럼 긁적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바꿔 말해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자기만의 밀실에 숨어 스페인의 어지러운 지도가 야하게 그려져 있는 한편의 통속 애정소설을 단숨에 읽는 것과 같다. 그것도 혼을 빼놓고 그 이야기에 온통 빠져서 말이다.

진중함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이 싸구려 냄새 나는 세상에서 알모도바르는 곳곳을 들쑤시고 헤집는다. 마치 마약 또는 다른 무엇이 들어있는 가방을 찾기 위해 몰래 어느 여자의 방 안에 잠입해 모든 물건들을 엉클어 놓는,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 여자의 사진에 한 눈에 반해버려 그 와중에도 들통나지 않을 곳에 도청장치를 부착하고 빠져나가는 갱스터처럼, 알모도바르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찾아온다.

알모도바르는 '어둠 사이로' 자기도 모르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버린 수녀의 삼류 로맨스 소설가다운 필력(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녀의 소설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찬탄을 받기도 했다)과, 감방에서 갓 출감한 '신선한 육체/라이브 플레쉬'를 소유한 빅토르의 원기왕성함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키카'의 야한 색채 감각으로, 감정과잉의 결을, 그 '열정의 미로'를 치밀하게 직조한다.

그의 모든 영화에서, 호흡의 속도를 잠시 접고 다소 톤을 바꾼 〈비밀의 꽃〉에서마저도, 사랑과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이야기는 절제되지 못하고 분방하게 흘러 넘치고 종잡을 수 없게 펼쳐지는가 싶더니, 정확히 신경쇠약 직전에 그 어지러움은 단칼에 추스르게 된다. 사건들을 바로크식으로 병렬하는 내러티브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로버트 알트만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에 비견될 만하지만, 알모도바르는 그들마저 멀리 따돌릴 정도다.

그러나 그의 못 말리게 분방한 어지러움은 공공연히 그 인공미를 과시하면서도 전혀 계획된 것이라는 낌새를 주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이 무계획성의, 무작위성의 인상은 속임수이다. 감상적이지만 탁월한 갱스터처럼, 자신의 모든 영화에 탄생과 부활, 공유와 연대, 순환 등의 모티프들을 촘촘하게 얽어내는 프로젝트를 능수능란하게 우연 아래 감출 만큼 알모도바르는 지극히 주도면밀한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알모도바르가 한 인물이 자신의 인공적 몸에 대해 슬쩍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스타가 불참한 무대에 대신 나와 원 wo/man 쇼를 펼치는 여장 남자 아그라도의 입을 빌어. 그/녀는 관객들에게 자신이 여자의 몸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치루어야 했는지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비용은 아끼지 말라고 조언한다. "돈이 들수록 그만큼 내가 꿈꾸는 나에게 가까워지거든요." 아그라도의 이 말은 샅샅이 계획되지만 그럼에도 제 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인공성에 대한 알모도바르 자신의 옹호론이자 그 자신이 꿈꿔 마지않는 여성성에 대한 매혹의 변이다. 그 매혹적인 것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간다는데, 비용이란 문제가 되겠는가?

여성적인 것에 매료되었음을 숨기지 않는 게이 남성감독 알모도바르는 여자들의 너무나 통속적인 감정 소사(小史)를 조울증에 걸린 여자처럼 또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처럼 더듬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경박하고 야한 원색주의의 스타일을 표방하지만, 그의 인물들은 어떤 특정한 원색이라 단정짓기 어려울 만큼 주기적으로 들썩거리며 색을 뒤섞는 무법자들이다. 성적으로 반듯하지 않은 남자들까지 포함해서 그들 대부분은 비유적으로 아버지의 법을 어기고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는 여자들이다.

반면 반듯한 남자들은 너무나 미미한 삶을 선사받는다. 그들은 갑자기 죽어버리고 불구가 되거나(〈내 어머니의 모든 것〉, 〈라이브 플레쉬〉), 구역질을 유발할 정도는 아니지만 추잡하고 우유부단한 바람둥이들이다(〈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등등). 알모도바르의 영화로부터 보자면, 필경 남자들은 바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하찮은 남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자들은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심지어는 사랑을 구걸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관계는 종말을, 전혀 슬프지 않은, 오히려 잘 됐다 싶은 전화위복의 종말을 맞는다. 이제야 여자들만 모여 거리낌없이 수다 떨 수 있게 된 것이다.

확실히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은 '여성들에 대한, 여성들에게 바치는, 여성들의 영화'라고 불릴만 하다. 여자들에게 애정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흠모와 경외감을 감추지 못하며,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세 여배우들(베티 데이비스, 지나 롤랜즈, 로미 슈나이더)에게 그런 것처럼, 남자들의 변덕스러움에 시달리는 여자들에게, 여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삶을 제대로 통찰할 수 있는 마지막 현자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영화를 고스란히 헌납하는 알모도바르는 '여성의 감독'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요컨대 삶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통찰은 통속적일 수 있지만 결코 진부할 수는 없으며 이 천연덕스럽게 무법자적이며 어수선한 웃음 뒷 끝에는 시큰한 감동마저 남는다. 그리고 결국엔 우리의 감정선을 긁어대고 우리의 혀끝을 잡아 뺀다. 모두들 갈 데까지 가보았고 더 이상 미련 가질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 이제 속엣말을 속시원히 내뱉어보라는 식이다. 정말이지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욱하고 치밀어 오르던 말들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게다가 편견만 버린다면 덤으로 삶에 대한 통찰력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감독인가.

주요 작품

80년 〈페피, 루시, 봄 그리고 엄마 같은 다른 소녀들〉
82년 〈열정의 미로〉
84년 〈어둠 사이로〉
85년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요?〉
86년 〈마타도르〉(비디오 출시)
87년 〈욕망의 법칙〉
88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비디오 출시)
90년 〈욕망의 낮과 밤〉(비디오 출시)
91년 〈하이힐〉(비디오 출시)
93년 〈키카〉(비디오 출시)
96년 〈비밀의 꽃〉(비디오 출시)
98년 〈라이브 플래쉬〉(비디오 출시)
99년 〈내 어머니의 모든 것〉(비디오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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