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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00) 영화 ‘장군의 수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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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성일·윤정희 주연의 영화 ‘장군의 수염’(1968). 중앙일보 이어령 고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작품은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억압적인 풍경을 은유했다. [중앙포토]


1960년대 중·후반 문예영화 전성기가 찾아왔다. 제작사들은 너도나도 한국문학 명작을 영화로 만들었다. 나는 67년 김동리의 ‘까치소리’, 황순원 의 ‘일월(日月)’, 68년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 등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이어령 전 장관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현 중앙일보 상임고문)의 중편 ‘장군의 수염’은 66년 월간 세대(世代)에 게재되자마자 화제가 됐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수염 기른 장군이 등장하자 국민 모두 너도나도 수염을 기르는데, 신문사 사진기자 철훈(신성일)만이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지성인 철훈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박정희 정권을 희화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어령은 지식인의 아이콘이었다. 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한 그는 문단의 ‘우상’이었던 문학평론가 백철 교수를 거꾸러뜨렸다. 62년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연재하며 한국문화의 본질을 탐구했고, 66년 소설 ‘장군의 수염’으로 입지를 굳혔다.

 이 영화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태창흥업 김태수 사장은 서울시청 부근 중식당에서 이어령을 비롯해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 변종하 화백 등과 회의를 열었다. 기획·자문 회의까지 하면서 만든 영화는 그때까지 없었다. 이어령은 한국영화의 도식적 틀을 벗어나자며 새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성구 감독도 이어령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여러 차례 의논을 했다.

 문화계의 재주꾼들도 합류했다. 64년 ‘무진기행’을 발표한 소설가 김승옥이 이어령의 추천으로 시나리오를 맡았다. 화단의 거물인 변종하 화백이 세트를 꾸몄다. 변 화백의 제자이자 당시 서울대 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내 여동생 강명희와 그의 남편이 된 임세택이 작업을 도왔다. 강명희·임세택 부부는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67년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제작했으며 만화가 신동우 화백의 형으로도 유명한 신동헌 감독이 영화에 삽입된 애니메이션 부분을 책임졌다. 수염을 단 장군이 말을 타고 거들먹거리며 군중을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돈 문제로 군중 신을 찍기 부담스러웠는 데다, 새로운 형식미로 수염의 상징성을 강조하려 했다.

 ‘장군의 수염’은 원작도 유명했지만 영화 덕분에 더욱 화제가 됐다. 당시 문화와 정권을 다의적으로 비판하는 알레고리 수법의 작품이었다. 박 정권은 이 영화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워낙 검열이 엄청난 시기여서 자칫하면 상영이 중지될 수 있었다. 주변에서 원작자에게 이 작품의 진의를 넌지시 묻는 질문도 많았다. 그때마다 이어령은 “쿠바 카스트로의 수염 이야기…”라며 얼버무렸다고 한다.

 정부도 인기가 높았던 이어령을 건드리는 데 부담을 느꼈다. 68년 제7회 대종상에서 제작상·시나리오상을 받은 ‘장군의 수염’은 사회비판적 작품이 아닌, 순수문예물로 분류돼 무탈하게 상영을 마쳤다. 이어령은 “신성일이 지성인의 내적 고독을 잘 소화했다. 이 영화로 대학생 사이에서 지적인 배우로 자리매김 했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이어령 고문과 때때로 오가며 인사한다. 젊은 시절부터 “밥 한 번 먹자”고 부담 없이 말하는 그의 담백한 성품이 멋지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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