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펀드매니저는 괴롭다 … 실탄 넘쳐 은행에 예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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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국내 굴지의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펀드매니저 이모(45)씨. 지난달 그가 운용하는 주식형 펀드로 500억원이 넘는 돈이 새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요즘은 왠지 맘이 편치 않다고 한다. “지난달 고통스러울 만큼의 주가 급락이 있은 뒤라 적극적인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씨는 주식 비중을 줄이는 전략을 택했다. 평소 95% 이상을 주식에 투자하던 그는 시장이 급격히 미끄럼을 탄 요즘 주식 비율을 점차 축소시켜 90% 정도까지 낮췄다.

 #1조원 이상의 주식형 펀드를 관리하는 펀드매니저 박모(42)씨. 최근 그는 펀드 자금의 5% 정도를 은행 보통예금에 투자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박씨는 “증시가 한 번씩 내려갈 때마다 주식을 분할매수하고 있지만 자금 유입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며 “실탄은 많지만 어디에 넣어야 할지는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분간 보통예금에 자금을 넣어두고 투자 기회를 엿볼 계획이다.

  흔들리는 주식 시장이 펀드매니저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주식형 펀드에 2008년 1월 이후 최대의 뭉칫돈이 몰려들고 있지만 막상 그 돈을 굴리는 펀드매너저에겐 좀체 운용이 쉽지 않아서다. 대부분의 펀드매니저는 새로 들어온 자금을 일단 현금성 자산에 쌓아두고 관망하는 편이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지난 7일 기준으로 인덱스 펀드를 제외한 전체 국내 주식형 펀드의 주식편입비율은 91.8%로 나타났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1월(89.57%) 이후 가장 낮다. 증시가 급락하기 전인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이 비율은 95.2%였다. 불과 한 달 사이 3.4%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지난달 주식형 펀드(인덱스 펀드 제외)에 들어온 자금(2조1409억원)의 56.3%인 1조2050억원이 예금이나 금융회사 간 초단기예금인 콜론 같은 현금성 자산에 투자됐다. 특히 보통예금의 비중은 지난 7월 0.7%에서 지난 7일 4.0%로 급증했다. 일단 증시 상황을 지켜보다가 언제든 주식을 살 수 있도록 ‘잠복 근무’ 중인 셈이다. 은행 예금보다 고수익을 노리며 펀드에 돈을 맡긴 고객 입장에선 일부 투자금을 다시 은행에 맡긴 꼴이기도 하다.

  주식형 펀드(인덱스 펀드 제외) 순자산총액이 300억원이 넘는 운용사 가운데 주식편입비율이 가장 낮은 곳은 84.8%의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이었다. 지난 7월 이 비율이 91.9%였던 이 회사는 지난달 이후 주식 비중을 7.1%포인트 낮춰 축소폭도 가장 컸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은 한 달 새 91.3%에서 86.4%로, 미래에셋자산운용은 93.6%에서 87.6%로 낮췄다. 반면에 SEI에셋코리아자산운용은 같은 기간 주식 비중을 90.8%에서 94.9%로 4.1%포인트 높였다. 이 회사처럼 증시가 주저앉은 게 기회라고 여기며 주식 비중을 높인 회사는 7곳이었다. 하지만 조사 대상 37개 자산운용사 중 30곳은 주식 비중을 줄였다.

 운용사들의 관망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서동필 우리투자증권 펀드 애널리스트는 “펀드로 들어온 돈을 현금으로 갖고 있으면 수익이 나지 않지만 이번 급락장에서는 옳은 선택이 됐다”며 “주식 시장의 여러 악재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만큼 주식편입이 빠르게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급격히 낮아졌던 주식편입비율이 다시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에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일부에선 고수익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펀드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대형 운용사의 자산운용본부장은 “2008년 금융위기 때 ‘100년 만의 위기’라는 말이 있었는데 3년 만에 다시 급락장이 찾아온 걸 보면 이제까지 가졌던 시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며 “절대수익률 추구형 같은 상품이 많아지는 식으로 업계 판도가 변화될 것 같다”고 말했다.  

허진 기자

◆콜론(Call Loan)=금융기관들끼리 주고받는 초단기 자금거래. 회수를 요구하면 이튿날 바로 갚아야 해서 ‘부르면 대답한다’는 뜻의 ‘콜(Call)’이란 이름이 붙었다. 금융기관이 일시적인 유휴자금을 운용할 때 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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