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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완전하다”던 트리셰·드라기마저 … 유로체제 약점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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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유럽중앙은행(ECB) 현 총재인 장클로드 트리셰(69)와 차기 총재인 마리오 드라기(64)가 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경제콘퍼런스에서 한목소리를 냈다. 유로(euro) 체제의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재정위기를 계기로 유로 체제의 약점이 드러났다”며 “회원국 리더들이 하루 빨리 나서 재정통합 등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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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다음 달 ECB 총재 인장을 주고받는다. 유로 지킴이들이 한자리에서 유로 체제의 문제점을 시인하기는 처음이다. 트리셰는 2009년 12월 그리스 사태가 처음 불거진 이후 재정위기 파고가 몇 차례 높아졌지만 그때마다 “유로 체제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드라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통화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게 바로 유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랬던 그들이 말을 바꾼 셈이다. 그만큼 요즘 유로존(유로 사용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방증이다.

 벨기에 뤼벵대 폴 그라우베(경제학) 교수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이번 주 유로 체제는 삼각파도(Pyramidal Wave) 위에 놓일 가능성이 커보인다”고 전망했다. 세 가지 위기(파도)가 엄습하면서 유로 체제를 궁지에 몰 수도 있다는 얘기다.

 첫 번째 위기는 재정위기 전염이다. 유로존 3위 경제권인 이탈리아가 다음 타깃이 되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 국채값이 휘청했다. ECB가 나서서 이탈리아 국채를 사들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4)의 재정개혁에 대한 불신 탓이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올해 안에 달성하기로 한 재정개혁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도 커졌다.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금융 80억 유로(약 12조1000억원) 지급을 미룰 태세다. 그리스 쪽에 확실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가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소문이 런던 금융시장에 확산되고 있다”고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이 전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는 이달 9일 채권 만기 연장 등을 앞두고 있다. 물량이 1300억 유로(약 201조4000억원)에 이른다. 채권자들은 원금 20% 정도를 손해보면서 만기가 긴 새 채권을 받게 된다. 로이터 통신은 “채권자들이 90% 정도 참여해야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며 “하지만 시장은 불안감 때문에 성공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패하면 2차 그리스 구제작전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파도인 유럽발 금융위기의 조짐마저 이날 불거졌다. 유럽 주요 은행들의 주가가 폭락했다. 미국의 더블딥(경기 회복 후 재침체) 우려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탓이다. 특히 재정위기국 국채의 부실화(디폴트) 우려가 가장 큰 몫을 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 단기자금 시장 참여자들이 유럽 은행들과 자금거래를 축소하기 시작했다”고 이날 전했다. 유럽 은행들에 대한 불신의 역류가 일기 시작한 셈이다.

 도이체방크 최고경영자(CEO)인 요제프 애커만은 “국채 부실화를 정확하게 회계장부에 올리기 시작하면 유럽 은행 몇 곳은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유럽 은행들은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 등의 국채를 정상 채권으로 보고 회계상 손실처리(대손충당)를 하지 않았다. 독일 만하임대 사챠 스테판(금융) 교수는 “은행 파산은 유럽발 금융위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파도는 정치 리더십 위기다. 유럽의 리더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주 말 지방선거에서 졌다. 올 들어 치러진 선거에서 모두 진 셈이다. 독일이 구제금융에 가장 많은 돈을 내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큰 이유로 꼽혔다. 메르켈이 직면한 난관은 선거만이 아니다. 7일 밤 독일 헌법재판소는 구제금융의 합헌 여부를 판결한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독일 헌재가 구제금융 제공을 막지는 않겠지만 의회의 감시를 강화하는 쪽으로 판결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그렇게 되면 메르켈의 구제작전이 의회 반발 때문에 실시되지 못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 유로 회원국인 세르비아 의회는 구제금융 참여를 놓고 자국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금융통화 석학인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는 “메르켈 등 유럽 리더들이 국내 정치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에선 유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 대책을 내놓기 힘들다”며 “유럽 리더들의 타협으로 탄생한 유로가 끝내 그들의 무기력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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