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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벤처기업 투자로 큰 재미

중앙일보

입력

벤처기업이 新경제의 미개척지라면 벤처 자본가들은 총을 차고 다니는 도박사들이다. 벤처 자본가들은 실리콘 밸리의 미러클 마일(캘리포나아州 멘로 파크의 샌드 힐 로드)에 앉아 닷컴 세계의 어느 곳에 돈을 걸어야 할지 결정한 다음 신생 첨단기술 벤처기업이 험난한 길을 무사히 통과해 마침내 주식공모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 과정에서 벤처 자본가는 막대한 투자 이익을 얻어 재산에 포르셰 박스터 자동차를 한두 대 정도 추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벤처 자본가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레슬리 버대즈가 4년 된 지프를 타고 다니며 으리으리한 사무실이 즐비한 샌드 힐에서 24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칸막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평범한 벤처 투자가가 아니라 첨단기술계의 거인인 인텔社의 핵심 중역이다.

인텔 캐피털의 사장인 버대즈는 지난 10년간 다른 기업들에 투자해왔다. 그러나 다른 기존 대기업들은 겨우 2년 전부터 타기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이제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오러클·델·노키아 등도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아이디어와 사업모델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자 기존 기업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축내게 될 신생 벤처기업들을 사전에 제압하는 방법을 궁리하게 됐다(마이크로소프트만 해도 처음에는 IBM의 레이더에 잘 잡히지도 않던 미미한 기업이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들은 결국 조기 투자를 통해 신생 벤처기업을 우군으로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신생기업의 주식이 공모되면 투자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도 매력의 포인트다. 美 벤처자본 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신생 벤처기업에 투자된 총 4백80억 달러 가운데 대기업이 투자한 액수는 70억 달러에 이르렀다. 기업 벤처링 리포트의 데이브 배리는 “18개월 전만 해도 기존 대기업이 벤처투자전문 계열사를 갖는다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기존 기업들의 벤처투자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지만 첨단기술업계에서는 아직도 인텔의 벤처투자 규모가 가장 크다. 버대즈는 지난 한 해에만 2백50여 개의 공·사기업에 12억 달러를 투자해 지난해 12월 말 인텔 캐피털의 포트폴리오(보유주식의 총시가)를 80억 달러 이상으로 불려 놓았다. 전체 투자액 20억 달러의 4배에 이르는 금액이다(물론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 바이어스社 같은 최고의 벤처투자 회사 수익률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그 다음으로 벤처투자를 많이 하는 첨단기술 기업은 시스코다. 시스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85개 기업에 8억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시스코의 포트폴리오는 현재 4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인텔 캐피털은 다양한 종류의 벤처기업을 투자대상으로 보고 있는 반면 경쟁사들은 투자대상을 좁게 잡고 있다. 예를 들어 시스코는 인터넷 인프라 장비라는 자사의 전문분야 범주에 속하거나 그 주변 사업을 하는 회사를 주요 투자대상으로 삼는다.

시스코의 아머 하나피 사업개발 담당 부사장은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얻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시스코는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나면 그 기업과 기술을 공유하고 제품을 공동으로 판매한다. 하나피는 “신생 벤처기업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는 수단으로 투자를 활용한다”고 말했다. 투자가 합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시스코가 인수한 회사의 약 15%는 시스코가 창업자금을 지원한 벤처기업이다.

반면 인텔 캐피털의 버대즈는 다양한 벤처기업 가운데서 투자대상을 선정한다. 그 결과 인텔은 이토이스(온라인 장난감 판매업체), 아이빌리지(여성 온라인 네트워크), CBS 스포츠라인(스포츠 포털 사이트) 등 다양한 신생기업들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들 회사중 인텔의 핵심인 컴퓨터 칩 사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기업은 없다.

버대즈는 이 벤처기업들이 성공하면 소비자들은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나 멀티미디어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처리속도가 더 빠른 칩과 인터넷 장비의 수요가 창출될 것이다. 버대즈는 “첨단기술 시장의 환경에서 홀로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며 “인텔은 차세대 기술과 제품을 위한 사업환경 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버대즈는 50년대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앤디 그로브 인텔 회장도 헝가리 출신이다). 그는 68년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다음 가는 서열 3위의 자리에 올랐다. 인텔의 엔지니어링 부문을 담당한 버대즈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 인텔을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90년대 초 인텔 캐피털(당시 명칭은 ‘기업사업개발 그룹’이었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매년 PC 기술의 발전과 직접 관련있는 기업 여섯 개 정도에만 투자했으며 건당 투자액이 1백만 달러를 넘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인텔은 PC뿐 아니라 인터넷 장비나 네트워킹 장비 및 서버에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버대즈도 여기에 맞춰 투자전략의 폭을 넓혔다. 지난해 버대즈의 투자팀은 회사명을 인텔 캐피털로 바꾸고 새로운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인텔 캐피털이 투자한 신생기업중에는 크게 성공한 곳이 많다(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잉크토미·브로드캐스트.컴·브로드컴은 모두 인텔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 와중에 야후나 아메리카 온라인(AOL)을 놓치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버대즈는 “당시에는 그것을 포털이 아니라 단순한 검색엔진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는 벤처투자 회사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기업인들은 우량기업의 자금을 선호한다. 그 결과 인텔은 다른 벤처투자 회사보다 더 유리한 입장이다. 스포츠 프로그래밍 사이트 쿼카.컴(Quokka.com)의 지분 5%를 주식공모 전 인텔에 매각한 앨런 러매던은 “인텔 같은 기업은 투자대상을 고르는 안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또 인텔의 투자를 유치한 기업은 단순히 자본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인텔 엔지니어와 실험장비까지 활용할 수 있다. 게다가 인텔이 인증한 기업은 주식공모 때 높이 평가받는다. 지난해 리눅스 관련 기업들이 잇따라 주식을 공모했을 때 증시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요 파트너인 인텔이 그들에게 투자를 함으로써 윈도보다는 리눅스 운영체제를 지지한다는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VA 리눅스 시스템스社의 최고경영자 래리 오거스틴은 “인텔 덕분에 많은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인텔은 VA 리눅스 시스템스에 2백50만 달러를 투자했다).

기업 벤처 투자가들은 기존의 벤처 자본가들과는 달리 투자한 신생기업의 이사회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며 간부 채용 같은 일상적 경영정책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텔 캐피털은 초기 단계에 있는 신생기업을 선정해 기존의 벤처 자본가들과 손잡고 공동투자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인텔 캐피털의 스티븐 나츠하임 부사장은 “기존 벤처 자본가들은 신생기업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고 우리는 전략·기술·판매 측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둘이 어우러지면 환상적인 콤비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도 인텔의 방식을 본받아 벤처 자본가들과 손을 잡고 신생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지난달 의료를 위한 온라인 서비스를 구축하는 소기업 포인트셰어社는 의료용품 매매 사이트를 운영하는 네오포마社의 투자를 유치했다. 사실 네오포마가 주식을 공모한 것도 겨우 세 달 전이다. 다시 말해 신생기업이 다른 신생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新경제에서는 새 것도 금방 옛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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