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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유산 받으려 평양 사는 손녀 탈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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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남북 주민 간 소송이 늘어나면서 남한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탈북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최근 서울서부지법에서는 남한 할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탈북한 손녀가 새할머니를 상대로 낸 상속회복 청구 소송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탈북 여성 A씨의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결혼해 3남 1녀를 뒀지만 6·25 당시 조카만 데리고 월남하게 됐다. 그는 남한에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재혼도 했다.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북한에 남은 할아버지의 아들은 모두 숨졌다. 그러나 셋째 아들의 딸인 A씨는 몇 해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할아버지는 A씨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송금해 줬다. 중국과 평양 등에서 수차례 상봉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A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할머니가 부동산을 모두 상속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할아버지의 재산을 찾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남한에 무사히 도착한 A씨는 자신이 고인의 친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조카의 확인서와 북한 당국이 발행한 공민증 등을 법원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새할머니는 A씨에 대한 유전자 감정을 신청한 상태다.

이미 지난 7월 북한 주민이 우리 법원의 재판절차를 통해 상속재산의 소유권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윤모(68)씨 등 북한에 살고 있는 4명의 형제자매가 "1987년 숨진 아버지의 유산 100억원을 분배해 달라”며 남한의 새어머니(77)와 이복 형제자매들을 상대로 낸 소송이 조정으로 마무리되면서다. 이들은 부동산 일부와 일정액의 돈을 남한의 형제자매들이 북한의 이복 형제자매들에게 주기로 합의했다.

이 소송은 1·4 후퇴 당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맏딸(76)이 친형제 자매인 윤씨 등으로부터 소송위임장을 받아 남한에서 새어머니와 이복 형제자매를 상대로 대신 소송을 진행했었다. 정부와 법조계에 따르면 한 50대 북한 남성도 중국에 있는 대리인과 국내 변호사를 통해 남한에서 살다가 수십억원대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산을 찾기 위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 소송 외에도 다양한 법적 분쟁이 남북 간에 벌어지고 있다. 남북 첫 저작권 소송은『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씨가 “동의 없이 할아버지의 소설 ‘황진이’를 잡지에 실었다”고 남한의 출판사 대훈서적을 상대로 낸 것이다.

이 사건은 2006년 출판사가 1만 달러를 홍씨에게 주고 출판권을 갖기로 합의하면서 마무리됐다.

월북주민 이종하씨가 “내 땅을 제3자가 임의로 매도했다”며 이 땅을 매수한 김포시 등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등기 소송을 내기도 했다. 남한의 부인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이씨를 만나 땅에 대해 듣고 난 뒤에야 68년 이미 다른 사람이 팔아치운 사실을 알게 돼 뒤늦게 소송이 제기됐다.

◆정부, ‘남북주민 가족·상속 특례법’ 국회 제출=남북 간 소송이 다양화하고 상속 등 가족관계 소송이 증가하면서 법무부는 ‘남북주민 사이의 가족 관계와 상속 등에 관한 특례법’을 마련했다.

이 법안은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해 곧 국회에 제출된다. 특례법에 따르면 ▶부부가 남북으로 갈라져 재혼한 경우 나중에 한 결혼을 취소할 수 없고 ▶남북 주민 간 상속 소송에서 피상속인을 부양한 남한 주민의 기여분을 별도로 인정하며 ▶북한 주민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북한으로 재산을 가져가는 경우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북한 주민이 취득한 남한 내 재산은 법원이 선임한 재산관리인이 관리해야 한다.

구희령·채윤경 기자

◆북한 주민의 소송 자격=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간주하고 우리 법률은 북한을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도 국내 법원에 소송을 내는 데 결격 사유가 없다. 북한 주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사자나 분쟁 사안이 대한민국과 실질적 관련이 있는 경우 우리 법원이 재판 관할권을 갖기 때문에 소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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