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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왜 에디톨로지(Editology)인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다 한 방에 가는 수가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33호 10면

김정운 교수가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에서 봤다는 아이팟 광고 포스터. 김 교수는 이 사진을 통해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는 자극의 ‘선택적 지각’ 이론을 설명한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어디를 제일 먼저 봤는가? 세상의 모든 남자는 본능적으로 한곳을 먼저 보게 된다. 여인 복부 밑의 MP3플레이어, 즉 아이팟이다. 수년 전 일본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지역을 걷다가 본 광고다. 멍하니 서서 애플의 아이팟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아이팟 밑에는 도대체 뭐가 있기에…. 뭐 이런 생각을 골똘히 했던 것 같다.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상대방의 생식기만 보고 쫓아다닌다. 발정기란 ‘이제 종족 번식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기간이다. 암컷과 수컷은 서로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갖가지 신호를 보낸다. 이때 상대의 생식기가 보내는 예민한 신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차 하는 순간, 자신의 종족이 번성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매일 발정기다. 밤낮으로 섹스만 생각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상대방의 나체를 보게 되면 바로 성기 쪽으로 시선이 가게 돼 있다. 동물적 본능이다. 그 위에 아이팟을 올려놓은 것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무서운 광고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가끔 아이팟을 보지 않고 애먼 곳을 먼저 보는 이들이 있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이나 허벅지, 혹은 입술·눈 등등. 한마디로 변태(?)다. 종족 번식과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 인간들은 대부분 변태다. 발정기라고 남들과 똑같은 것을 봐서는 절대 창조적일 수 없다. 성기 중심주의를 벗어나야만 창조적이 될 수 있다. 하이힐이나 채찍, 혹은 촛농을 좋아하기도 한다. 가끔은 스타킹에 목 졸리며 숨 막히는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다. 흥분이 지나쳐 실제로 숨 막혀 죽는 이들도 가끔 있다.

‘매일 발정기’ 이외에도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생식기 간의 결합이 내면화되거나 갖가지 상징으로 매개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에로티시즘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인간 미학의 시작은 바로 이런 내면화된 발정기, 즉 시도 때도 가리지 않게 된 성욕의 ‘기호학적 매개(semiotic mediation)’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의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자극이 존재한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안의 모든 자극을 한꺼번에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자극만 받아들인다. 문제는 아이팟 광고의 경우처럼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극의 내용이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사실이다.

창조적 인간은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결정적인 자극을 잡아채는 반면 우울증 환자는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 자극만 받아들인다. 인터넷 악플을 보고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연예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에 관한 긍정적인 자극은 지나치고 부정적인 자극만 자꾸 보게 된다. 안 보면 또 불안해진다.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악순환의 덫이다.

바라보기는 하지만 못 보는 사람들
선택적 지각의 반대편에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현상이 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실험으로 인지심리학의 스타 교수가 된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피험자들에게 검은 옷의 선수 세 명과 노란 옷의 선수 세 명이 서로 농구공을 주고받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 준다. 공의 움직임을 쫓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때 피험자들에게 노란 옷의 선수들이 패스를 몇 번 하는지 정확히 세어 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실험의 진짜 내용은 다른 쪽에서 시작된다. 노란 옷의 선수들과 까만 옷의 선수들이 서로 패스를 주고받는 사이 고릴라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나 천천히 걸어온다. 화면 가운데 오면 정면을 바라보며 가슴까지 두드린다. 그리고는 서서히 왼쪽으로 걸어가 사라진다.(작은 사진)

화면이 정지된 뒤 사람들에게 고릴라를 봤는가 물어본다. 패스 횟수를 확인하라는 과제가 없었다면 모두 고릴라를 봤을 것이다. 만약 고릴라를 못 봤다면 그는 아주 심각한 ‘주의력 결핍 장애’다. 그만큼 티 나게 고릴라는 행동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고릴라를 못 봤다. 노란 옷의 선수들이 패스하는 횟수에 집중하느라 화면 가운데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차브리스와 사이먼스는 동일한 실험을 전 세계적으로 시행했다. 인종·성별·직종·계층과 상관없이 매번 50% 이상의 사람들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기업 강연을 할 때마다 나도 동일한 비디오 자료를 보여 주고 실험해 봤다. 역시 절반 이상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나중에 고릴라가 나타나는 장면을 보고는 자신이 본 화면과 다른 화면이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기업의 임원들일수록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장사가 잘 될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간다. 요즘 스마트폰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애플의 아이폰이 들어오기 몇 달 전 삼성전자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적이 있다. 아이폰이 들어오면 삼성의 휴대전화는 한 방에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 내 생각은 실제로 그랬다. 인간 관계가 신통치 않아 혼자 정보기술(IT) 기기를 가지고 노는 게 취미인 내게 아이폰은 내가 바라던 바로 그 기계였다. PDA와 휴대전화를 동시에 들고 다니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둘을 합친 PDA폰이 있기는 했지만 영 어설펐다. 무겁기만 하고 자주 버그가 났다. 모아 둔 자료가 한 번에 날아가 버려 기기를 집어 던진 경우도 있었다. 대책 없이 분화돼 가는 IT 기기들의 컨버전스를 부르짖던 내게 아이폰은 정말 감동적인 대안이었다.

한국에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아이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자 한 임원이 못 견디겠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미 다 분해해 조사해 봤다. 겁낼 것 전혀 없다. 우리 휴대전화에 기술적으로 전혀 상대가 안 된다. 게다가 중요 부품은 대부분 우리 삼성 거다.” 전문용어를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그에게 난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몇 달 뒤 아이폰이 상륙하자 삼성의 휴대전화는 어떻게 됐는가? 한 방에 훅 갔다. 뒤늦게 ‘옴니아’니 ‘갤럭시’니 내놓으며 쫓아가지만 역부족이다. 삼성은 그래도 훌륭하게 잘 방어한 편이다. 기세등등하던 노키아는 어떻고, 모토로라는 어떤가?

고릴라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보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다 보니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바뀌는지 못 본다는 이야기다. 주머니마다 IT 기기를 넣어야 하는 소비자들이 너무 불편하다며 하나로 좀 합쳐 줄 수는 없냐며 눈앞에서 가슴을 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눈에는 전혀 안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하는 첫째 단계다. 그러나 이 첫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이나 ‘무주의 맹시’ 같은 왜곡된 현상들이 나타난다. 사안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이야기다. 받아들인 자극은 이후 정보를 구성하고, 정보는 서로 연합해 지식으로 발전한다. 메타지식과 지혜의 차원도 있다. 이는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에디톨로지의 주요 내용이다.

왜 에디톨로지인가?
명칭이 사람들에게 낯설면 참 힘들다. 내가 ‘에디톨로지’라는 제목으로 중앙SUNDAY에 연재를 시작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거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같은 신흥종교 하려는 거 아니냐”고 한다. “니 구라(?)면 교주 해도 된다”며, “교주나 교수나 한 끗 차이다”는 둥 각자 제멋대로 쉴 새 없이 덧붙인다. 거참, 수십 년을 함께한 이 친구들에겐 난 언제나 ‘밥’이며 ‘안주’다. 실제로 내가 유학을 떠날 때 친구들은 술집 천장에 내 사진을 붙여 놓았다. 나 없는 동안 안주 대신으로 하겠다는 거였다. 이 친구들에게 불만은 없다. 예로부터 뭘 제대로 해 보려는 사람들은 죄다 주변 사람에게 무시당했다.

생각해 보니 ‘중앙SUNDAY’도 처음엔 참 힘들었을 것 같다. 한국의 청소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즐겼던 전설의 전문 학술지(?), Journal of Sunday, 즉 ‘선데이서울’의 21세기적 부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선데이’를 이런 고급 교양지(?)의 제목으로 겁 없이 붙인 것이다. 시대가 바뀐 만큼 ‘선데이’의 의미도 바뀐 거다. 여자 연예인의 촌스러운 비키니 수영복을 음미하는 ‘선데이’에서, 지식의 풍요로움을 맛보는 ‘SUNDAY’로 그 의미가 재구성된 것이다. 짜릿한 시각적 자극을 소비하기에 급급했던 노동 기반 사회의 짧은 휴식에서 교양을 소비하는 지식사회의 여가로 의미전환이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에디톨로지(editology), 즉 편집학이다. 불과 20~30년 만에 선데이의 의미가 재구성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과정을 나는 ‘편집’이라고 해석한다. 신문이나 잡지의 편집자가 원고를 모아 지면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처럼, 또는 영화의 편집자가 거친 녹화자료들을 모아 속도나 장면의 길이를 편집해 전혀 다른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건과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편집한다. 그 구체적인 편집의 방법론을 나는 ‘에디톨로지’라고 명명한다.

비슷한 개념은 많다. 통섭, 학제 간 연구, 크로스오버, 융합 등등. 에디톨로지와 유사한 이런 개념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론이 너무 세분화돼 서로 전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거의 바벨탑 수준이다. 세상을 부분으로 나누고, 이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고 이해하면 전체가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근대의 해석학은 끝난 지 이미 오래됐다. 통섭·융합을 부르짖는 이유는 이 낡은 해석학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통섭이나 융합이 아니고 에디톨로지인가? 통섭이나 융합은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구체적인 적용도 무척 힘들다.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마주 보고 폼 잡는다고 통섭과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좌우간 난 어렵게 이야기하며 폼 잡는 이들은 질색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것이다. 삶의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편집 사례들을 통해 창조적 행위의 본질과 방법론을 설명하고자 한다.

지난 10년간 나는 ‘재미는 창조다’는 주제로 창조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했다. 재미와 창조는 심리학적으로 동의어다. 이에 관해서는 2005년에 쓴 노는 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에 자세히 써 놓았다. 당시에 내 책은 겨우 2만 부 팔렸다. 반면 새벽부터 벌떡벌떡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어설픈 일본 작가의 아침형 인간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얼리버드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도대체 뭐냐는 이야기다. 일찍 잡아먹히기밖에 더하겠냐는 거다. 열심히 하자는 이야기는 충분히 했다.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유희이며 놀이다. 이 창조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에디톨로지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편집이라는 이야기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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