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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여름 이야기] 태평양 건너온 150명의 재미교포 ‘선생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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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r(쿠어~ㄹ).” “쿠어~.” 혀가 스르륵 말리는 듯한 벡키(26·여)의 발음에 10여명의 아이들이 신나서 따라 읽는다. 평범한 한국 대학생 같은 선생님 입에서 ‘본토’ 발음이 나오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는 표정들이다. 벡키가 이번엔 칠판에 ‘quirrel’을 쓰자 학생들이 먼저 “쿼럴~”하고 외친다.

지난달 29일 전라북도 군산 성산교회에서 열린 CTS기독교TV 영어캠프(E-CAMP)에 참가한 아이들이 재미교포 대학생에게 ‘미국문화’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CTS기독교TV 제공]

  지난달 29일 오후 2시께 전북 군산의 성산교회 1층 교육관. CTS기독교TV가 주최하는 영어캠프(E-CAMP)의 파닉스 수업이 한창이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이 캠프는 재미교포 자원봉사자들과 국내 농어촌·저소득층 아이들을 연결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캘리포니아주와 워싱턴 D.C. 등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고등학생·대학생 150여명이 CTS로부터 항공료 등 경비 일부를 지원받아 태평양을 건너왔다. 지난달 18일 한국 땅을 밟은 이들은 7개팀으로 나뉘어 22일부터 4박5일씩 2차에 걸쳐 캠프를 진행했다. 강원도 삼척과 충남 서천, 전북 익산·군산·완주, 그리고 대전·광주·부산 등 전국의 교회 14곳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1500여명이 이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군산 성산교회 캠프의 경우 캘리포니아주 프리먼트 지역의 생명길교회에서 온 벡키 김과 민정기(18)·봉기(15) 형제, 존 김(20) 등 8명이 선생님으로 참여했다. 나이가 어린 봉기 군조차 영어게임 수업의 보조 선생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등 이들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재밌게 가르쳐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이라 오히려 한국말이 너무 서툴러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 중에서는 초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간 정기 군이 한국말을 가장 잘 했다. 정기 군은 올 가을 사우스캘리포니아대(USC)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실컷 놀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의미하게 쉬기보다 사랑을 실천해보고 싶었다”며 오랜 만에 고국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재미교포 2세인 벡키는 USC에서 영어교육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싱크로나이즈 미국 올림픽대표팀 출신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해 5위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LA카운티 지역팀의 수영 코치도 맡고 있는데, 한국에 오기 위해 코치직은 휴가를 냈다고 한다. 벡키는 “매년 방학 때나 훈련 일정이 없을 때는 인도네시아·멕시코 등 해외를 돌아다니며 봉사와 선교활동을 해왔어요”라며 “휴가 때 쉬는 대신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간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시간을 모두 쉬는데 쓰는 것보다 돕는데 쓰면 더 의미 있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성산교회 캠프에는 이 교회를 다니거나 군산 시내에 거주하는 아이들 81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6개 조로 나뉘어 파닉스·영어노래·미국생활 등 하루 6개씩의 수업을 들었다. 4박5일 동안 교회가 제공해주는 식사와 잠자리를 이용하며 아이들이 낸 캠프 참가비는 교재비 2만원이 전부다. 라유림(13·중앙중 1)양은 “집 근처에 논이랑 밭밖에 없고 학원도 안 다녀서 방학 때는 심심한데 올해는 이렇게 영어를 배우러 와서 신나요”라고 말했다. 강한빛(12·중앙중 1)군은 “미국 사람처럼 안 생긴 선생님들이 발음은 미국 사람이랑 똑같아서 신기해요”라며 웃었다.

CTS영어캠프는 이달 3일 끝났지만 재미교포 학생들은 고국에 대해 더 배울 기회를 가졌다. 4일부터 사흘간 천안함이 있는 해군 2함대 사령부와 독립기념관 등을 둘러본 것이다. 6일 서울 동작구 CTS아트홀에서 해단식을 가진 이들은 “재미있게 가르치는 게 좀 힘들긴 했어도 정말 좋은 기회였다”며 아쉬운 18박19일의 고국방문 일정을 마무리했다.

윤새별 행복동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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