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89) 필름공장 사기사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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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7년 신성일·김지미가 주연한 영화 ‘동심초’. 신성일은 그 해 평소 그가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필름공장 건립에 1억원을 투자했다. 필름 수급 때문에 영화계가 울고 웃던 시절이었다.


영화배우로 많은 돈을 버는 나는 충무로에 뭔가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답을 필름공장에서 찾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필름을 전량 수입했다. 축구공을 못 만들어 시골에선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때였다. 당시 필름은 특별관세를 무는 사치성 물품으로 분류됐다. 고가일 수밖에 없었다. 제작자가 감독에게 “2만 피트(1피트=30.48㎝) 이상 쓰면 그 값을 개런티에서 제하겠다”고 압박을 가할 정도였다. 감독들은 필름을 아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컸다. 또 필름이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도 많았다.

 필름은 크게 세 가지였다. 미국산 코닥, 유럽의 게바, 일본의 후지다. 생산지 기후에 따라 질이 조금씩 달랐다. 코닥필름은 삼원색이 또렷하게 나왔다. 할리우드의 날씨가 맑기 때문이다. 값이 가장 비쌌다. 후지필름은 녹색이 좀 강하게 나오고, 게바필름은 회색이 깔려 있었다.

 당시 영화 상영시간은 105분이 스탠더드였다. 첫 회를 오전 10시 틀고 하루 6회 상영했다. 통금까지 고려한 시간이다. 105분에는 약 8890피트의 필름이 들어간다. 2000년 이후 제작된 모 영화에 30만 피트를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건 제작자를 죽이는 일이다.

 나는 감독이 필름만 마음대로 쓸 수 있어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했다. 필름공장을 세워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아내 엄앵란의 외삼촌인 노재원씨가 평소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JP(김종필 전 총리)와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아주 강직한 분이셨다. 6·25 때 부상 당해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다. 나는 처가 식구 중에서 그분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허물 없이 이야기했다. 서울 중부경찰서 옆 영락교회 부근의 중국집 건물을 구입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분이 “경찰서 옆에 장사되는 것 없으니, 다른 건물 사”라고 해 구입을 포기하기도 했다.

 67년 어느 날 노재원씨가 “코닥필름 공장을 세울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코닥필름의 독일 지사장 사위가 서긍연이라는 변호사의 아들인데, 서씨를 잘 안다는 것이다. 기대에 찬 나는 “한 번 데려오세요”라고 답했다.

 며칠 후 변호사 서씨가 우리 집에 왔다. 후덕하고 점잖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이 써 보냈다는 영어 편지를 들고 왔다. 번역을 한 것도 없고, 나도 마땅히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변호사인데다, 처외삼촌이 소개한 사람이니 믿는 수밖에. 서씨는 땅 문서 하나를 내놓으며 필름공장 건립안을 제시했다.

 “상봉동 3650평(여섯 필지)입니다. 이 땅에다 필름공장을 지읍시다. 신 선생 쪽에서 현찰 1억원을 대주십시오. 회사 대표도 신 선생이 맡고요.”

 행정구역상으로 상봉 1동과 6동이었다. 건국대 뒤편과 뚝섬에 걸친 땅이었다. 당시 우리가 보유한 현찰은 약 8000만원. 66년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허리우드극장 인수 제의를 거절하면서 갖고 있던 돈이다. 1억원을 맞추기 위해 극장을 지으려고 면목시장 옆에 사놓은 680평의 땅까지 팔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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