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으로 한 달 살던 작가, 에르메스가 모셔간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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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동 꼼데가르송 플래그십스토어(대형 단독매장) 지하 갤러리 ‘한남 식스’에서 열리는 나카히라 타쿠마 개인전 장면. 좁고 긴 전시공간에 액자도 없이 사진을 핀으로 꽂아 놓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업미술가 김상돈(38)씨는 3년 전까지 1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종일 밥을 굶고 전시회 뒷풀이를 찾아 다니며 저녁 한 끼를 때웠다. 서울 불광동의 작가 후원 공간에서 지내며 매일 아침 북한산 약수터 길을 오르내렸다. 그는 여기서 만난 사람들, 장면들을 비디오 설치 작업 ‘솔베이지의 노래’ 연작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산은 인간의 고상하고도 저속한 욕망이 식별 불가능하게 혼재하는 지대, 성(聖)과 속(俗)이 뒤엉킨 공간”이라고 말했다. 버려지고 짓밟히고 채이는, 소외된 것에 숭고미를 부여하는 것, 그가 추구하는 예술이다.

 이 작품은 서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되고 있다. 올해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작가로 꼽혀서다. 이곳은 에르메스 매장 3층에 있는 미술 전시공간이다. ‘88만원 세대’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했던 이 변두리 예술가와 1000만원 넘는 가방이 진열된 건물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2011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작가로 선정된 김상돈씨가 신발 깔창과 채색한 등산 모자로 만든 설치작품 ‘솔베이지의 노래’ 시리즈 안에 서 있다.

 김씨는 “에르메스라는 상품보다, 이곳 미술상의 역사가 내겐 중요하다. 이곳을 거쳐간 작가들 중 존경하는 선배가 많다”고 말했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은 2000년 제정됐다. 국내외 미술 전문가로 꾸려진 5명의 심사위원단이 세 명 혹은 세 팀의 작가를 후보로 선정, 신작 제작·전시를 지원한다. 전시 후 수상자를 선정, 상패와 상금 2000만원을 부상으로 전달한다. 더러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명품가방에 예술적 이미지를 입히는 작업을 진행하는 곳들도, 전시 후 작품을 소장하는 재단들도 있지만 에르메스 재단에선 별도의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지원 규모 면에서도, 조건 없는 후원이라는 면에서도 국내 미술계에선 드문 일이다. 가장 흔치 않은 것은 이런 후원이 지속된 기간, 그리고 11년간 이곳을 거쳐간 작가들이다. 장영혜·김범·고(故) 박이소·서도호·박찬경 등 오늘날의 한국 미술을 이끄는 작가들이 이곳 출신이다. 김상돈씨는 “조건 없는 후원, 역대 수상자들의 명예를 공유하는 것, 그 때문에 젊은 작가들은 이 미술상을 거쳐가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올해 후보자는 김씨 외에 토건주의(土建主義)와 군사문화의 비현실적 결합을 사진, 영화 등으로 포착해 온 최원준(32)씨, 4시간 동안 시멘트를 밟아 응고를 지연시키는 퍼포먼스 영상 ‘행진 댄스’로 노동의 고단함을 곱씹은 작가 그룹 파트타임스위트 등이다.

 에르메스 재단 디렉터 카트린 츠키니스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동시대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토론의 장을 만드는 행위”라고 말했다. 에르메스 재단은 내년부터 후보 작가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방침이다.

 ◆입장료 없고, 작품 판매 않고=서울 한남동의 5층짜리 길쭉한 건물 ‘꼼데가르송’에서는 예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불어로 ‘소년처럼’이라는 의미의 이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의 한국 플래그십 스토어 지하에는 ‘한남 식스(six)’라는 이름의 전시공간이 있다. 입장료는 없다. 작품 판매도 하지 않는다.

 현재 일본 사진가 나카히라 타쿠마(中平卓馬·64)의 개인전 ‘키리카에’가 열리고 있다. 건물 모양대로 좁고 긴 공간에 가벽(假壁)을 세워 양분하고, 거기에 사진 278점을 액자도 없이 핀으로 가득 붙여 놓았다. 작가는 “액자에 끼우는 순간 작품이 고정된다. 내가 보는 작품과 관객 각각이 보는 작품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인생도 변하지 않나”라고 물었다.

 일본 오사카(大阪)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든 이 전시공간의 디렉팅은 대표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川久保玲)가 직접 한다. 그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옷을 만드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며 1981년 파리 컬렉션에 진출, 동양적 아방가르드의 진수를 보여준 인물이다.

 이곳 윤정실 큐레이터는 “꼼데가르송의 정신은 바로 아방가르드(전위)다. 거기 맞는 작가·작품을 고른다. 유명 작가 전시는 여기 아니어도 많이들 한다. ‘꼼데가르송은 이런 곳’이란 걸 옷 뿐 아니라 작품으로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시정보

▶2011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10월 4일까지, 9월 22일 수상작가 발표. 서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 무료. 02-544-7722.

▶‘키리카에’전=28일까지. 서울 한남동 꼼데가르송 한남 식스. 무료. 02-749-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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