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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옛날 투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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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옛날에도 투표제도가 있었다. 권점(圈點)이 그것이다. 인사 후보자의 성명을 적은 망단자(望單子)에 동그라미를 찍는 것이 권점이다. 문·무관을 뽑을 때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선임관(選任官), 즉 판서·참판·참의·정랑·좌랑 등이 후보자의 이름 아래 동그라미를 찍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인물이 선발되었다. 지금의 무기명 비밀투표와 비슷하다.

 『만기요람(萬機要覽)』 『훈련도감(訓鍊都監)』 조항에 “팔색(八色), 사소(四所), 육사(六司)의 각 초(哨) 패두(牌頭)에 결원이 있을 때 그 초색(哨色) 가운데서 권점해서 승진시킨다”고 되어 있어서 군대 내 승진 인사 때도 권점을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권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홍문관 관리를 뽑는 것이었다. 홍문관의 교리(敎理)와 수찬(修撰) 등을 뽑을 때 1차는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관원이 모여 권점했는데, 이것이 홍문록(弘文錄)이었다. 2차는 도당(都堂)에서 재신들이 권점했는데, 보통 도당(都堂)은 의정부를 뜻하지만 『은대조례(銀臺條例)』 『예전(禮典)』 ‘유신(儒臣)’조에 따르면 권점을 행하기 위해 의정부에 모이는 관료는 임금의 경연을 이끄는 영경연사(領經筵事)와 대제학, 좌참찬·우참찬, 이조의 판서와 참의라고 전하고 있다. 이들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명종 때 대비의 동생이던 윤원형이 세도를 잡고 있을 때 그의 심복이던 진복창(陣復昌)이 “이번 홍문록에는 이무강(李無彊)이 제일 먼저 천거될 것이다”고 말하자 모두 그렇다고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권점을 하고 보니 이무강은 홍문록에 끼지 못했다. 그래서 “누가 권점을 하지 않았는가?”라면서 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나온다.

 선조 때 최립(崔岦)이 쓴 『이몽량(李夢亮) 신도비명』에는 정유길(鄭惟吉)과 이량(李樑)이 문형(文衡:대제학) 후보에 올랐는데 정유길과 친했던 이몽량은 “종이를 앞에 두고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끝내 권점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남구만(南九萬)은 『좌참찬 이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左參贊李公請諡行狀)』에서 이 일을 기록하면서 당시 의논하는 자들이 “이량을 꺾은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임당에게 권점을 주지 않은 것은 더 고상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오늘 무상급식을 둘러싼 주민투표에서 시민들이 이무강을 거부한 것처럼 적극 투표로 의사를 표시할지, 이몽량처럼 투표 자체를 거부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