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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고리’에 빠져 작은 악재에도 휘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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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서 한 주식거래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주식시세를 쳐다보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면서 이날 독일 증시의 DAX 지수는 2.19% 하락했다. [프랑크푸르트 AP=연합뉴스]


‘불의 고리(링 오브 파이어, ring of fire)’. 태평양 연안을 따라 동아시아와 남북아메리카를 잇는 환태평양 화산대를 뜻하는 용어다. 말 그대로 화산 활동이 활발해 화산 폭발과 지진이 잦은 지역이다. 인도네시아·일본·미국 캘리포니아·칠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진으로 인한 해일(쓰나미)의 피해도 크다. 한국은 다행히도 여기서 살짝 비켜난 데다 일본 열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 지진과 해일의 안전지대에 속한다.

하지만 지난주 한국 증시는 전 세계를 휩쓴 ‘공포의 고리(링 오브 피어, ring of fear)’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가 증폭되고, 유럽 은행의 단기 유동성 악화 문제가 불거지면서 자신감을 잃은 투자자들이 잇따라 주식을 던졌다. 주가 하락의 쓰나미는 유럽과 미국 증시를 거쳐 증폭되면서 한국을 강타했다. 미국·유럽의 경기침체가 현실이 되면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증시의 약세가 한국 증시를 끌어내리고, 그 결과가 유럽 증시에 악영향을 미치는 도미노 하락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 증시에 큰 변동은 없었다. 지난달 말부터 이어졌던 하락세가 마무리되며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투자자들은 작은 악재에도 견디지 못했다. 발단은 미국이었다. 18일(현지시간) 모건스탠리가 “앞으로 6~12개월 사이에 더블딥(이중침체)이 올 수 있다”며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을 낮췄다. 이 회사는 이날 “미국과 유럽이 경기침체에 접근했으며 신흥시장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는 보고서를 냈다.

암울한 경제지표가 상황을 부채질했다. 미국 고용노동부는 지난주 신규 실업수당 신청이 40만8000건으로 일주일 새 9000건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주택거래실적도 467만 채로 전달보다 3.5% 감소했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8월 제조업지수 역시 -30.7로 나왔다. 이 지수는 0보다 높으면 경기 확장, 0 미만이면 경기 수축을 의미한다. -30은 2009년 3월 이후 최저치다.

미국발 악재는 이날 유럽 증시의 급락을 가져왔다. 여기에 독일의 2분기 성장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유럽 은행들이 단기 유동성 부족에 시달린다는 분석이 기름을 부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유로존 한 은행이 달러대출 프로그램을 이용해 5억 달러를 빌려갔다고 밝혔다. 올 2월 이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한 첫 사례다. 악재가 겹치자 소시에테제네랄이 12% 하락하는 등 유럽 주요 대형 은행들의 주가가 일제히 7~8% 내렸다. 유럽 증시가 5% 안팎으로 하락한 여파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어졌다. 다우지수는 이날 3.68% 내렸다.

18일 유럽·미국의 주가 급락은 19일 한국 시장에 메가톤급 악재로 작용했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6.22% 내리며 전 세계 주요 증시 가운데 낙폭이 가장 컸다. 이어 열린 유럽과 미국 시장도 낙폭을 줄이기는 했지만 하락세가 이어졌다. 다시 다음 차례는 22일 오전 9시 열리는 한국 증시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와 주식시장의 하락이 서로의 상황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지속적인 주가 하락은 소비자와 기업 심리를 위축시키는데, 그 결과 소비가 줄고 투자가 위축되기 때문에 주가는 더 떨어진다는 것이다. 모건스탠리의 애널리스트 요아킴 펠스는 “악재의 악순환(네거티브 피드백 루프)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주 전 세계 증시의 약세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올 들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 경기 침체와 유럽 재정·금융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다시 도졌을 뿐이다. 문제는 갈수록 공포가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국 정부에서 내놓을 카드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두 차례 양적 완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시중에 풀린 돈은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업들은 투자를 미루고 내부에 돈을 쌓아뒀다. 무디스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1조 달러에 달한다. 금융회사들은 중소기업이나 가계에 돈을 빌려주기보다는 미국 국채만 사들이고 있다.

유럽에선 그리스 사태에서 시작된 재정위기가 국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은행권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주 만나 유로본드 발행과 유럽금융안정기금(EFSF)의 확충을 논의했지만 합의안을 내지 못했다. 단일통화인 유로를 도입한 덕에 수출이 늘어나는 혜택을 본 독일이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메르켈 총리는 유럽의 이익보다 독일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다.

이에 대해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가 유럽 국가의 파산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는 18일 프랑스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가 무너지면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 금융위기로 이어져 전 세계가 깊은 경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며 “유럽 은행들은 자본금이 적고 EU 국가 채권을 너무 많이 보유하고 있는 만큼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증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독일이 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소로스의 진단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미국과 유럽의 ‘일본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0일 “재패나이제이션이 새로운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주가 폭락→경기침체’의 악순환으로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와드와니펀드 운영자인 수실 와드와니는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대안이 없어 돈이 국채로 몰리는 기현상까지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반론도 나온다.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의 닐 두타 이코노미스트는 “필라델피아 연준 지수를 포함한 최근의 부정적 지표들은 실물경제보다는 위축된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며 “이를 일본식 장기 불황이나 제2의 대공황의 조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창우 기자 kcwss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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