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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와 연극에서 ‘인간’을 읽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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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02면

1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에서 맥베스 역을 맡은 젤리코 루치치.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그동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다 폰테 3부작, 즉 2006년 ‘피가로의 결혼’, 2008년 ‘돈 조반니’, 2009년 ‘여자란 다 그래’(코지 판 투테)를 순차적으로 완성해 선보였던 연출가 클라우스 구트의 작품을 올해에는 처음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세 작품에서 공통으로 깃털, 거대한 나무와 숲 등 자연을 배경으로 쓴 구트의 연출에서 자연은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뜻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흰 천사가, ‘여자란 다 그래’에서는 검은 천사가 주인공들의 성적인 욕망을 부추겼다.

7월 27일~ 8월 30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2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특히 13일 무대에 오른 ‘피가로의 결혼’은 완성도가 높았다. 알마비바 백작 역의 바리톤 사이먼 킨리사이드가 완전히 극을 지배하며 이끌어나갔다. 피가로 역의 짙은 음영 베이스 바리톤인 에르빈 슈로트가 활약했음에도 오히려 그의 역할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청아한 음성으로 아리아 ‘자, 연인이여, 이리로 와요’를 부른 소프라노 말리스 페테르센의 목소리는 수잔나에 적격이었다. DVD에서 안나 네트렙코가 부른 수잔나를 뛰어넘는 가창으로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3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한 장면. [사진 잘츠부르크 조직위원회 제공]

2009년과 2010년 돈 조반니를 불렀던 크리스토프 말트만은 이번 ‘여자란 다 그래’(15일)에서 굴리엘모를 노래했다. 극 중 검은 천사로 분장한 노철학자 돈 알폰조 역의 보 스코부스와 쟁쟁한 바리톤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모차르트 다 폰테 3부작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주였다. ‘피가로의 결혼’은 로빈 티치아티가 지휘한 계몽주의 시대 오케스트라가, ‘여자란 다 그래’는 마르크 민콥스키가 지휘한 ‘레 뮈지시엥 루브르’가 시대 악기로 연주를 들려줘 모차르트 당대의 음악을 오페라 하우스에서 듣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안겼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가장 티켓을 구하기 어려웠던 작품은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다. 이미 지난해 11월 티켓이 오픈하자마자 매진됐던 이 작품은 공연 당일 ‘표 구함’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공연이기도 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 경연장으로 친숙한 펠젠라이트슐레를 무대로 고집한 연출가 페터 슈타인은 고풍스러운 의상과 연출로 요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4 모차르트의 오페라 ‘여자란 다 그래(코지 판 투테)’의 한 장면.[사진 잘츠부르크 조직위원회 제공]

젤리코 루치치는 깊이 있는 심리 묘사로 운명에 끌려가는 맥베스를 노래했고 타티아나 세랸의 레이디 맥베스는 무대를 압도했다. 두 사람의 이중창은 베르디 성악예술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한 가창이었다. 베르디 해석으로 정평이 나있는 리카르도 무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무티의 존재는 마치 생전 이 페스티벌을 지휘하던 카라얀을 연상케 했다.

무티하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화력 좋은 포효를 연상하지만 그가 얼마나 불과 함께 이성적인 절도와 절제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얼음도 갖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 ‘맥베스’(16일)와 베르디의 ‘레퀴엠’(14일)이었다. 무티의 지휘봉 밑에서 숭고한 장엄함으로 충만한 레퀴엠은 한 편의 ‘거대한 죽음의 오페라’와도 같았다. 객석 양 옆에도 천상의 트럼펫 소리를 배치한 무티의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이미 베르디 ‘레퀴엠’으로 성가가 높은 메조소프라노 올가 보로디나와 베이스 일다르 압드라자코프 부부(러시아)와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불가리아), 테너 사이미르 피르구(알바니아) 등 빈 필과 함께 연주한 동구권 4인방으로 구성된 솔리스트들은 베르디 ‘레퀴엠’에 최적화된 캐스팅이었다.

무티는 축제 마지막 주를 베를린 필과 함께 장식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무티와 함께 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는 지휘자였다. 이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이 알프스 자락의 도시에서 연주해 격찬을 받은 틸레만은 요즘 최고의 바그너, 슈트라우스의 권위 있는 해석자답게 슈트라우스의 ‘마술피리’라고 불리는 ‘그림자 없는 여인’에서 빈 필과 함께 화성의 향연을 벌이면서 탐미주의의 극치를 들려줬다.

‘그림자 없는 여인’을 연출한 크리스토프 로이는 영계와 속세를 오가는 오페라의 배경을 오페라 극장으로 바꿨다. 등장 인물들이 리허설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마지막에 빈소년합창단과 4명의 솔리스트들이 오스트리아 국기가 걸린 공연장에서 행복하게 공연하는 마무리로 오스트리아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특히 소프라노 에블린 헤르릿지우스는 훌륭한 발성, 빼어난 연기력, 무대를 압도하는 시원한 성량으로 틸레만과 나란히 발을 구르면서 환호하는 격찬을 받았다.

공연장에서 매일 만난 니혼TV의 다큐멘터리 담당 디렉터 모리 고이치는 “학생시절인 1990년부터 잘츠부르크를 찾았는데 취미로 거의 매년 온다. 틸레만이 지휘한 ‘그림자 없는 여인’을 메트와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봤는데 이번 공연이 베스트였다. 마치 예전에 시노폴리가 지휘한 ‘그림자 없는 여인’을 보고 감동했던 때와 맞먹는다”고 감동을 전했다. 최고의 해석자에게 최고의 악기가 주어진 것, 역시 빈 필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가을에 국립극장에서 연극으로 올려질 카렐 차펙 원작, 야나첵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은 13일 밤 9시부터 두 시간을 논스톱으로 달렸다. 시종일관 법정 재판장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 극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코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출가 크리스토프 마르탈러는 반복되는 등장인물들의 동작을 통해 시간과 인간사의 반복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역시 근·현대 음악에 정확하고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지성적인 지휘자 에사 페카 살로넨의 음악이 예리하게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빠질 수 없다. 무대·연기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된 ‘밤꾀꼬리’와 ‘이올란타’에서 네트렙코를 만날 수 있었다. 이보르 볼턴이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밤 꾀꼬리’에서는 러시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율리아 노비코바가 ‘밤꾀꼬리’ 역을 마치 새처럼 정교하게 소화해냈고 2부에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동화인 ‘이올란타’에서 네트렙코는 눈먼 공주 이올란타 역을 노래했다. 상대역인 보데몽을 부른 테너 표트르 베차와와의 이중창은 눈앞에서 다시 두 사람의 메트 ‘루치아’ 프로덕션을 보는 듯했다. 이올란타의 아버지인 르네 왕 역에는 세계적인 베이스 존 렐리아가 열창을, 로베르트 역에는 알렉세이 마르코프가 당당하게 노래했는데 역시 마르코프의 단단하고 자신감 넘치는 통렬한 가창은 일품이었다.

네트렙코는 역시 오페라 극장의 최고 프리마 돈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연기와 열렬한 가창은 (발성적 단점도 모두 커버하며)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최고의 캐스팅으로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화성을 노래해 줘 커다란 감동을 안겨준 이 공연은 네트렙코가 일본 지진 피해자를 위해 노래한 자선 공연이었는데 20만 유로가 모금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공연만 펼쳐진 게 아니다. 미래의 클래식 음악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여름 음악 아카데미도 함께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오페라 공연에서 무대 오케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연주도 했다. 오랜만에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는 이 프로그램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앙상블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렇게 젊은이와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잘츠부르크를 계속 음악의 성지로 만드는 길”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1920년 시작된 이래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모여 오늘도 다채롭게 클래식 음악을 펼치고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29일 베를린 필과 30일 ‘마크로풀로스 사건’으로 성대한 막을 내린다.


장일범씨는 월간 ‘객석’ 기자를 거쳐 러시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음악 해설ㆍ평론가로 KBS 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DJ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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