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Biz] 제임스 헤크먼“옛 과거시험은 폭넓은 지식 묻지 않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2면

계량경제학자와 유아교육의 만남. 세상 어떤 조합보다 생소하게 들릴 법한 결합이다. 어머니의 다사로움을 연상시키는 유아교육 같은 분야에 메마른 계량경제가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계량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 (James J. Heckman·67) 시카고대 교수는 이런 편견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그는 유아기 때의 과감한 교육과 보살핌이 어느 것보다 경제적이고 바람직한 투자임을 증명해낸 독특한 경제학자다. 지난주 열린 육아정책연구소(소장 조복희) 주최 세미나에 참석차 방한한 헤크먼 교수를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그의 논리를 들었다.

글=남정호 jTBC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계량경제학자가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사연이 있나.

 “과거 인간의 지적 능력과 관련된 책을 읽은 게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한 학자가 쓴 저서인데 그 내용이 아주 우울했다. 인간의 지능은 생물학적인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대놓고 쓰진 않았지만 백인과 흑인 간에 지능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생물학적인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런 주장을 접하게 되자 나는 크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주장이 올바른지 개인 차원에서 검증 작업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유명한 뇌신경전문의를 찾아가기도 했는데 거기서 유아들의 뇌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기준으론 몹시 초보적인 기술 수준이었지만 그곳에서 유아교육이 뇌 발달에 미치는 영향 등을 알 수 있었다. 이 무렵 유아교육과 관련된 책들도 읽기 시작, 차츰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일종의 취미가 됐다. 그러면서 지적 능력의 차이는 여러 방법을 통해 줄여나갈 수 있다는 증거를 찾게 됐고 그것이 지금의 연구로 이어졌다.”

●효율과 분배는 서로 이율배반적 관계여서 양쪽 모두를 높일 수 없다는 게 전통 경제학의 믿음이다. 그러나 당신은 유아교육을 통해 양쪽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논리는.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경제학자들을 놓고 ‘한쪽 팔의 학자’라고 비꼰 적이 있다. 경제학자들을 불러서 이야기하면 노상 ‘한편으론 (On the one hand)’ 이런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저런 단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는 효율성과 분배의 정의를 한꺼번에 이루기는 극히 어렵다. 예컨대 놀고 있는 한 청년에게 실업수당을 준다고 하자. 그러면 돈을 받은 청년은 휴가를 가든,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든,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안 하게 돼 분배의 문제는 개선될망정 효율성은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청소년 직업훈련도 마찬가지다. 18세 청소년에게 직업교육을 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교육에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 쉽게 기술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학습능력이 뒤진 청소년에게 정부가 무료 교육을 시킬 경우 더 우수한 학생들의 무상 학습 기회가 줄어드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거의 모든 경제 정책이 이런 식이다. 다만 유아교육에 대한 투자만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로 두 문제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교육에 집중 투자하면 아이의 성취동기를 향상시키고 이는 기술 습득에 큰 도움을 준다. 이는 인종과 빈부격차 등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아이들의 생산성을 올릴 뿐 아니라 분배의 정의 실현에도 보탬이 되는 것이다.”

●범죄 예방과 관련해 어릴 적 교육투자가 다른 정책보다 4배나 투자이율(rate of return)이 높다는 주장을 폈는데 그 근거는.

 “한 연구 결과 미국의 범죄율은 고교 졸업 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교 졸업자보다 중퇴자 또는 미진학자의 범죄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에 따르면 고교 졸업률을 높이는 게 범죄 방지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런데 유아 시절에 효과적으로 교육투자를 하면 성취동기를 높여 고교 졸업률도 상승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을 더 뽑아 잘 훈련시켜도 범죄율을 낮출 수 있다. 그런데 두 가지 범죄 예방 방안을 비교해 볼 때 유아교육 투자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실제로 범죄율 감소 대비 투자액을 계산해 보니 유아교육 쪽의 투자이율이 4배가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 실정, 특히 교육 상황을 잘 알고 있어 놀랐다.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의 실정은 한국인 제자 덕분에 잘 알게 됐다. (웃음) 한국의 교육열은 놀라운 것이다.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 발전도 상당 부분 교육투자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리려면 앞으로도 높은 수준의 교육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이루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려되는 부분은 한국 교육이 너무 시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수백 년 전부터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를 선발해온 한국과 중국 같은 나라의 경우 시험 중시가 새로운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이 지나치게 정형화됐다는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옛날 과거시험은 그래도 성공적인 삶에 필요한 폭넓은 지식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중요한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계산 능력, 암기력처럼 협소한 분야의 기술만을 묻는 테스트로 변질됐다.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내심, 정확성, 친화력과 같은 덕목도 중요하다. 이들 모두 측정하기 어렵지만 유교에서도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불행히도 지금의 한국 학교에서는 이런 덕목들을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배우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국에서도 많은 문제 가정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이혼 또는 사별 등으로 인해 자녀들이 한쪽 부모와 사는 한부모가정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럴 경우 한부모가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기 쉽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반드시 익혀야 할 두 축의 한쪽을 집에서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조기교육 단계에서 정부나 사회가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이뤄지지 않는 각종 성격검사가 이때에는 별문제 없이 실시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유아교육 프로그램 중에는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등을 검사하는 항목이 포함될 수 있다. 어릴 적 인성검사 등을 잘 활용하면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소프트 스킬(soft skill)’이 어느 정도인지 조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아이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파악,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소프트 스킬이란 뭔가.

 “지적 능력이나 지식 외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성적인 면을 뜻한다. 어려움을 참아내는 인내력,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릴 줄 아는 친화력, 그리고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여는 개방성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태도들은 창조성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누가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마음을 연 상태에서 참고 들으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무척 바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한국에서 열리는 유아교육 관련 세미나에 참여한 건 상당히 의외다.

 “한국은 흥미로우면서도 수많은 가능성이 있는 나라 아닌가. 게다가 육아정책연구소가 개최한 이번 세미나에는 지적이면서도 의욕 넘치는 학자들이 많이 참여해 기꺼이 참가를 결정했다.”

j 칵테일 >> ‘통섭의 학자’ 헤크먼

경제학과 교육학 등을 넘나드는 통섭의 학자 헤크먼 교수는 통계학 분야에서 유명하다. 특히 1970년대 그가 주창한 ‘선택의 편향성(selection bias)’ 이론은 독보적인 성과로 꼽힌다. 선택의 편향성 이론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설문조사 등을 할 때 잘못된 표본을 고름으로써 엉뚱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응답자들의 심리상태와 조사에 응하는 적극성 여부 등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헤크먼 교수의 주장이다.

 예컨대 간통죄 폐지 여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할 경우 비록 속으로는 지지하더라도 이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응답자는 적게 마련이다. 간통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자신이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큰 부도덕한 인물로 비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응답자들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설문조사에 참여하느냐도 질문의 내용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헤크먼 교수는 이 같은 선택의 편향성 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통계학적인 해결 방안까지 제시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통계학에서는 이 같은 방법을 ‘헤크먼 수정(Heckman correction)’이라고 부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