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미티서 돌아온 양승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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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 후보자가 18일 밤 11시50분쯤 경기도 성남시 자택으로 들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웃고 있다. [변선구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다음 달 25일 퇴임하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양승태(63·사법시험 12회) 전 대법관을 지명했다. 이번 지명 과정은 양 후보자가 인사검증에 동의하지 않아 후보군에서 빠졌다가 다시 이 대통령의 설득에 급거 귀국하는 등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이 같은 상황은 6년 만에 수장을 바꾸게 된 사법부의 변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8일 밤 11시50분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양 후보자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저보다 휠씬 능력이 많으신 분들이 있는데 제가 지명된 것이 송구스럽다”며 “영광스럽기에 앞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될는지 두려운 생각이 먼저이며, 일단 지명됐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청문회는 어떻게 준비할 거냐.

 “아직까지 국회 동의가 남아 있는데 특별히 말할 상황이 아니다.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 그동안 어디 있었나.

 “미국 시에라네바다 산맥(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360㎞를 트레킹하는 코스에 있었다. 도중에 중단하고 내려온 뒤 어젯밤 한국에 왔다.”

 이에 앞서 김두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날 오후 8시 반쯤 “양 후보자는 36년 법관 생활 동안 판결의 일관성을 유지해 왔고 우리 사회의 중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나갈 안정성과 시대 변화에 맞춰 사법부를 발전적으로 바꿔 나갈 개혁성을 함께 보유했다고 판단됐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청와대는 당초 대법원장 인선에 들어가면서 지난 2월 대법관에서 퇴임한 양 후보자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분류했다. 하지만 양 후보자는 청와대가 요구한 ‘자기검증 설문서’ 제출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인사청문회를 거치며 두 번 검증을 거쳤는데 무슨 검증을 또 받아야 하느냐”는 입장을 전달한 것이다. 이에 양 후보자가 후보군에서 빠지면서 한때 박일환(60·사시 15회) 법원행정처장과 목영준(56·사시 19회) 헌법재판관이 유력하게 검토되기도 했다. 그 사이 등산 애호가인 양 후보자는 지난 6일 출국해 미국 요세미티 공원에서 한 달간 트레킹을 하는 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목 재판관은 헌법재판소에서 대법원장으로 이동하는 데 대한 법원 내 반발 가능성이 걸림돌이 됐다. 여권 관계자는 “대법관 출신이 대법원장에 임명돼 오던 관례와 달리 목 재판관 지명 때는 집단반발이 있을 수 있다는 보고까지 청와대로 올라갔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 처장(경북 군위)의 경우 이 대통령(경북 포항)과 같은 경북 출신인 점이 취약점으로 부각됐다. 검찰 조직을 관장하는 권재진 법무부 장관이 TK(대구·경북) 출신인 상황에서 또다시 TK 출신을 사법부의 수장에 앉힐 경우 ‘공정사회’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부산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낸 양 후보자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양 후보자는 이 대통령의 설득에 결국 17일 밤 급히 미국에서 귀국했다. 법원 관계자는 “선이 굵은 양 후보자가 자신에 대한 검증이 거듭되는 데 거부감을 가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대통령의 의지의 정도가 변수였던 셈”이라고 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양 후보자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청와대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모양새를 취하게 됨에 따라 사법부의 독립성을 높일 수 있음은 물론 법원 변화를 주도할 내부의 통제력도 확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양 후보자 지명에 따라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미묘한 갈등관계를 이어 왔던 행정부-사법부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관심으로 떠올랐다. 또 진보 성향 대법관 제청과 ‘편향 판결’ 시비 등 논란이 거듭돼 왔던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와 어떤 차별성을 보여 나갈지 주목되고 있다.

 보수 성향인 양 후보자는 그간 급격한 사법제도 개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여 왔다. 그는 2005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기존 질서를 뒤엎고 전혀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공판중심주의와 불구속 재판를 앞세워 ‘사법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이 대법원장과 달리 ‘기본에 충실한 사법부’로의 회복에 중점을 둘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글=조강수·고정애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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