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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85) ‘만추’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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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성일·문정숙 주연의 영화 ‘만추’(1966). 한국 영화사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멜로드라마 중 하나다. 여주인공 혜림이 교도소로 복귀하기 전 훈과 우동을 먹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 최고 영화라고 자부하는 1966년작 ‘만추(晩秋)’는 다시 볼 수 없다. 불행하게도 필름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농익은 여인과 혈기 왕성한 남자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두 남녀가 언제, 어디에서 불타는 행위를 하는가. ‘만추’의 관전 포인트다. 이만희 감독은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여느 액션영화 이상으로 긴박하고 섬세하게 빚어냈다. ‘만추’가 네 번이나 리메이크 된 것은 멜로 드라마로서의 절대적 매력 때문이 아닐까.

 열차 칸에서 한 남자가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이 ‘만추’의 첫 장면이다. 남자는 형사에게 쫓기는 위조지폐단 행동대원 훈(신성일)이다. 훈은 열차 안에서 비련의 여인과 마주친다. 여인은 모범수 혜림(문정숙)이다. 출감을 얼마 앞두고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 뵈려 3박4일의 귀휴(특별휴가)를 나온 여인은 연령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르익은 상태. 교도소 생활로 남자의 체취를 맡은 지 오래다.

 훈은 인천에 있는 혜림의 어머니 묘소를 따라간다. 늦가을 바다와 갈색 해초를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데이트에서 서정적 영상이 나온다. 서로의 눈빛이 달라짐을 이 감독은 치밀한 계산으로 그려나갔다. 다음 데이트 장소는 스산한 창경궁 동물원이다. 날씨가 춥다 보니 동물들이 죄다 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정적이라며 고민하던 이 감독은 박제 전시실을 찾아갔다. 그의 선택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역시 탁월했다. 나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호랑이·올빼미 등 각종 동물의 울음소리와 동작을 코믹하게 연기했다.

 긴박한 상황에 놓인 남자는 격렬한 섹스로 카타르시스를 찾게 된다는 심리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멜로 드라마에서 서스펜스와 스릴은 유부녀가 다른 남자와 밀회할 때, 혹은 그 반대의 부적절한 관계 때에 상승된다. ‘만추’의 하이라이트인 두 남녀의 불타는 행위는 어느 역의 화물차 칸에서 이루어진다. 밑에 깔린 지푸라기는 동물을 수송하는 화물차임을 알려준다. 두 사람의 정사와 동시에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감독은 열차가 철로 이음새에 걸리는 ‘철커덕, 철커덕’ 소리로 정사를 표현했다. 다른 소리는 전혀 없다.

 혜림이 복귀하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아파트 건립으로 헐리기 직전의 마포형무소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철제 장식의 출입구를 가진 멋진 건물이었다. 형무소가 배경으로 걸리는 가운데, 한 쪽 벽만 세워진 오픈 세트에서 두 사람은 뜨거운 우동을 함께 먹는다. 고춧가루를 남자에게 타주는 것이 여인의 애정표시다. 문정숙의 눈물 어린 큰 눈이 슬프게 느껴진다.

 ‘만추’ 필름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괜찮은 작품들의 네거티브(현상) 필름은 홍콩으로 수출됐다. 영화사가 영세하던 시절, 개봉을 마친 영화 필름을 회수하는 시스템이 부실해 좋은 영화가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만추’ 필름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필름보관소에 있다는 말도 있다. 신상옥 감독이 필름 목록을 보았다고 했다. 오리지널 ‘만추’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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