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설(世說)

공약 이행하지 않으면 바꿔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이기선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경희대 객원교수

현역 의원을 공천하지 않는 것을 물갈이라고 한다. 물갈이는 정당이 지난 정치를 반성하며, 앞으로 더 나은 정치, 새로운 정치를 하겠으니 지지해 달라는 호소이자 약속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욕구가 강할수록,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클수록 그 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폭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유권자의 시각에서 물갈이가 이뤄져야 감동을 줄 수 있다. 정당이 소속 의원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의정활동 실적, 당에 대한 기여도, 지역구민의 지지도, 도덕성 등이 있다. 그러나 정작 유권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난 선거에서 내세웠던 공약의 이행 성과다.

 공약은 유권자가 후보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다. 제18대 총선 때 중앙선관위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15%의 유권자들이 공약을 보고 투표했다. 공약을 보고 후보자를 선택하는 데는 그것이 이행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과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공약은 선거 때 잠시 유권자를 현혹하는 신기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정책선거가 터를 잡으려면 우선 유권자들이 공약의 실현 가능성과 효과를 따져 투표하고, 선거 후에는 공약 이행 성과를 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최근 메니페스토 정책선거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학계나 언론계·시민단체 등에서 공약 검증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약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실현 가능 여부나 그 효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또 어설픈 검증은 자칫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에 비해 공직자가 공약을 제대로 지키는지, 그 효과가 어떤지는 객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유권자들이 공약 이행 성과를 평가한다면, 어느 공직자도 공약을 쉽게 저버릴 수 없을 것이고, 선거에서 무책임하고 선동적인 공약(空約)을 내세우려는 유혹도 억제할 것이다. 정치 포퓰리즘도 예방할 수 있다. 정치 불신을 허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공약 이행 성과를 평가하고, 다음 선거 후보자를 고르는 자료로 삼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유권자의 몫이지만, 정당도 공천 과정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앞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37%의 유권자들이 정당을 보고 투표했다. 그 바탕에는 정당이 당연히 훌륭한 후보자를 공천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이제 정당도 유권자의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이기선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