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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의 공부벌레들을 막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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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형식
대전·충청 취재팀장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방영됐던 TV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버드대는 최고의 우등생들이 모이는 곳이다. 학생은 대부분 고교 시절까지 최상위권 성적을 내면서 패배를 모르고 살았다. 이들의 사정은 하버드대에 입학하면서 달라진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수업시간 내내 모멸감을 겪는다. 수업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학생들은 역설적으로 이겨내려는 의지가 강했다. 드라마는 학생들이 불안과 좌절, 고통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국내에도 공부벌레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다. KAIST생의 70%는 어려서부터 과학영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과학고생들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KAIST는 71년 설립됐다.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과학 인재 양성을 위해서다. 작은 국토에다 천연자원도 별로 없는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사람을 키우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2006년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이런 정신에 투철했다. 그가 차등 등록금제나 교수 정년 심사 강화 등의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한 이유다. 그가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 KAIST의 재학생 수는 입학정원의 두 배나 됐다. KAIST생은 일반대학처럼 한 학기 등록금으로 수백만원을 내야 하는 부담이 없어 많은 학생이 학점을 이수하지 않고 졸업을 미뤘기 때문이다. 서 총장은 이 같은 면학분위기 쇄신을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미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이 주어진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다.

 이런 개혁의 성과는 2009년 영국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나타났다. KAIST의 순위가 2005년 232위에서 69위로 껑충 뛰었다. 물론 순위 상승만으로 서 총장의 개혁이 100%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KAIST가 다시 뜨거운 열정으로 끓어 오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는 성공작이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서 총장의 개혁호(號)는 올 들어 학생 4명이 잇따라 자살하는 바람에 동력을 잃었다. 문제는 서 총장의 독단이었다. 학생·교수 대표로 구성된 비상혁신위원회는 차등등록금 부과제 폐지 등 서 총장의 핵심 개혁안을 대부분 없앴다.

 서 총장의 독단은 견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명분으로 KAIST를 놀고먹는 과거의 느슨한 학교로 되돌리는 것은 안 된다. 혁신위가 서 총장의 개혁에 제동을 걸 수는 있으나 대한민국의 꿈까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KAIST에는 연 2000억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교수들은 성심껏 학생들을 가르쳐 과학 역군으로 키우라고 국민이 대주는 돈이다. 이 돈은 공짜가 아니다. 학생들은 국민으로부터 받은 세금을 기술 개발 등의 방법을 통해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현재 추진되는 KAIST 혁신이 더 투명하고, 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진행돼야 하는 이유다. 국민은 KAIST 개혁이 후퇴하면 회초리를 가할 권리가 있다.

서형식 대전·충청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