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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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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인 이제니씨는 시를 쓰는데도 구태여 의미전달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씨는 “하지만 방법의 차이일 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완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진작가 이에니 촬영]


말의 리듬 자체를 시로 만드는 솜씨
시 - 이제니 ‘나선의 바람’ 외 11편

나선의 바람

기억의 숲에서 망각의 바람까지 우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두울 수 없을 만치 어두워 숲으로 감추고 바람으로 속이고 숲에서 바람까지 나무에서 구름까지 감추고 삼키고 속이고 숙이고 죽이고 묻히고 말리고 밀리고 우리는 뒤에서 우리는 목소리 뒤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은 목소리 뒤에서 몇 발짝 뒤에서 간신히 어제에서 어제로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 숲으로 바람으로 구름에서 종이까지 어쩌면 거기에서 어쩌면 여기로 나선의 숲에서 나선의 바람까지 어둠은 더 이상 어두울 수 없을 만치 어두워 죽음의 숲에서 기억의 바람까지 어쩌면 이제는 아직도 적어도 걸어서 기어서 숲에서 숲으로 곁에서 곁으로 의지와 망각과 불과 춤과 어둠과 죽음과 거기에서 여기로 여기에서 거기로 이미 드디어 우리는 죽었고 나선의 바람과 숲의 불과 물의 춤에게 드디어 우리는 아직도 우리는 숲과 숲으로 망각과 망각으로 우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조용할 수 없으리만치 조용히 우리는 죽었고 나선의 바람에서 기억의 불까지 아직도 이미 벌써 또다시

시인 이제니(39)씨가 세는 나이로 마흔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시에 비해 이씨 자신은 덜 알려진 편이다. 갑작스럽게 유명해졌다는 얘기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가을에 출간한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였다. 제목에서부터 음악성이 느껴지는 시집은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물론 좋다는 평가가 많았다.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작들도 호평을 받았다. “말 다루는 솜씨가 젊은 시인들 중 두드러진다”(평론가 김진수), “정확한 의미 대상을 지칭하지 않으면서도 말의 리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돼 깜짝 놀랐다”(평론가 강계숙) 등등.

 구태여 ‘의미 전달’에 얽매이지 않는 이씨 시의 음악적 특징은 그의 이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대학시절 교내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헤비메탈을 즐겨 연주했다. 질풍노도 같은 세월이었단다. 시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시를 포크송으로 만들어왔다. ‘더블플레이 포임(Double Play Poem)’이라는 부정기 시낭송회를 만들어 시로 만든 노래를 부르고 시 낭송도 한다. 공연 장소는 주로 홍대 앞 카페. 후보작 중 ‘곱사등이의 둥근 뼈’‘나선의 바람’ 등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씨는 “가사 없이 멜로디나 큰 북소리만 들어도 고양감이 드는 음악 같은 시,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글쓴이의 의도가 드러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이씨가 무의미시(無意味詩)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정한 지향점이 분명히 있”단다.

 가령 이씨는 요즘 ‘나선(螺旋)’이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다. 이씨는 문장으로 ‘지금 이 순간’을 정확하게 붙잡는 일은 항상 실패한다고 본다. 그러나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현재를 말하다 보면 앞의 문장들은 차례로 소멸하며 일정한 흔적을 남긴다. 이런 과정이 이씨에게는 일종의 나선형 소용돌이로 느껴진다. 이씨는 또 “현기증·속도감 같은 감각도 나선의 이미지와 통하는 데가 있다”고 말했다.

 ‘나선의 바람’에는 이런 생각이 녹아 있다. 어쩐지 시원(始原)의 서늘한 바람 한 줄기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이제니=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우울한 현실 얘기, 곳곳에 똬리 튼 강렬함

소설 - 편혜영 ‘야행(夜行)’

소설가 편혜영씨는 “내게 익숙한 고향 서울의 이미지는 재개발, 철거의 풍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선지 잔혹하고 끔찍한 소재가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편혜영(39)씨의 소설은 최근 몇 년새 변신 중이다. 완만하지만 뚜렷한 궤적을 그리며 변하고 있다. 그 방향은 ‘기괴한 잔혹극에서 우울한 현실극으로’쯤 된다. 이전 소설집들에서 선보였던 섬뜩하고 강렬한 이야기는 최근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피와 살이 튀는 장면이 많아 ‘하드고어(Hardgore)’라고까지 얘기됐던 특징을 대신하는 것은 현실의 어두운 단면들이다. 지난 봄 출간한 세 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서는 무미건조하지만 반복적이어서 오히려 더 끔찍한 ‘일상의 비극’을 주로 다뤘다. 가령 매일 똑같은 점심을 사먹는 대학가 복사센터의 직원이 등장한다.(‘동일한 점심’)

 후보작 ‘야행’은 편씨 소설의 현주소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에 뿌리 내린 어두운 이야기이되 특유의 강렬함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소설은 첫 두 문장부터 눈길을 잡아 끈다. ‘벨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부엌에서 뒷물을 하고 있었다. 사타구니에서 나오는 것은 누런 오줌뿐이었지만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아랫도리는 언제나 눅진했다.’ 폐경·요실금 등을 연상시키는 여인의 육체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은밀한 생리는 가차 없이 까발겨진다.

 ‘뒷물’의 주인공인 그녀는 철거를 코앞에 둔 재건축 아파트 단지를 끝내 떠나지 않고 홀로 버티는 중이다. 아들이 하나 있긴 하지만 자식이라기보다는 ‘웬수’에 가깝다. 한때 부유했으나 몰락을 거듭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철없는 자식이나마 아들로부터 다음날 다른 곳으로 모셔갈 거라는 얘기를 듣고 아파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신산스런 인생 복기(復棋)와 섬뜩한 공포 체험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오줌 지린 냄새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목욕을 시도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난데 없는 비상벨이 울린 것. 다리 통증이 심해 바퀴 달린 회전의자에 가슴을 얹은 채 양손을 썰매 타듯 놀려 이동해야 하는 그녀, 옷 챙겨 입을 새도 없이 벌거벗은 채 허둥댄다.

 급기야 이주를 재촉하던 시공사 직원으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불쑥 현관문을 따고 침입한다.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그녀의 얼굴 한뼘 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는 빤히 쳐다본다. 칠흑같은 어둠 속 남자의 표정은 웃고 있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소설 마지막 장면, 누군가 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들인 것인지, 종전의 시공사 직원인 것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소설은 모호하게 끝을 맺는다.

 편씨는 “과거 내 소설이 출렁거리는 늪의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습도를 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의 색깔 변화에 대한 나름의 해명이다. 아리송한 결말은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기 위한 일종의 장치.

 소설을 쓴 계기는 일본 쓰나미였다. 편씨는 “급하게 대피한 사람의 소지품 중 가장 많은 게 신분증·가족사진 등 최소한의 신분 증명이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극한상황이 닥쳤을 때 자기 것으로 챙길 수 있는 게 누구나 많지는 않을 것 같은 상황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편혜영=1972년 서울 출생.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오이 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장편 『재와 빨강』.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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