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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요구에 귀 기울였을 때 전경련 힘 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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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지난 수십여 년간 굵직굵직한 산업 청사진을 제시하며 경제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또 국내 기업과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앞장서 대변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래서 한때 ‘재계의 본산’ ‘재계의 맏형’이란 타이틀까지 얻으며 자부심이 넘쳤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몇몇 대기업과 회원사들만을 챙긴다는 인상을 주면서 평범한 ‘이익단체’ 중 한 곳으로 위상이 추락했다. 국민들과 사회에서 불어닥친 변화의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다. 16일 창립 50주년을 맞는 민간 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얘기다. 공교롭게도 ‘지천명 (知天命)’을 코앞에 두고 정치권 ‘로비 권유’ 파문까지 덮쳐 전경련은 전에 없던 위기를 맞았다.

주요 그룹들에 ‘유력 정치인을 나눠 맡아 로비해 달라’는 문건을 돌렸다가 기업들로부터도 빈축을 사는 처지에 몰렸다. 그래서 재계 역시 축하 메시지보다는 따가운 질책과 훈계 일색이다.

 “지금이라도 전경련이 기업과 국민들의 소통의 창구로 적극 변신하지 않으면 존립 자체도 힘들어질 것이다(A그룹 고위 임원).” “전경련이 시대를 거스르는 행태를 되풀이할 경우 기업들엔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만 될 것(B그룹 간부).”

 사실 설립 이래 전경련은 소통을 ‘키워드’로 내세워 국내 최고의 민간경제단체란 위상을 얻어냈다. 과거 전경련을 이끌던 정주영(현대그룹)·구자경(LG그룹)·최종현(SK그룹) 회장을 비롯한 대다수 전경련 회장들은 수시로 시민·대학생·법조인 등 각계각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故) 정주영 회장(13∼17대 전경련 회장)이 8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강연은 당시 KBS 제3TV(현 EBS)를 통해 전국에 녹화중계까지 됐다. 그때 강연에서 정 회장은 “한국 경제는 관(官)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민간 기업인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 이들을 더욱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이전의 전경련 회장들은 창업 기업인으로서 친기업 분위기를 확산하는 ‘스토리 텔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자신들이 땀 흘려 일군 기업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연스레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뤄낸 산업화 시대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던 것. 이런 방식으로 전경련 회장들이 국민과 적극 소통을 하면서 전경련도 함께 신뢰도가 올라갔다.

 익명을 원한 전임 전경련 부회장은 “국민이 신뢰를 보내는데 회원사들이 어찌 전경련을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결국 소통의 리더십이 전경련 힘의 근원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리더십 아래 전경련 회원사들도 똘똘 뭉쳤다. 전경련의 부름에 대기업 그룹의 최고위 경영진이 일사불란하게 모였고, 이 단체의 활동 결과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97년 2월 당시 야당이 ‘무노동·무임금 원칙 폐기와 정리해고제 철회’를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을 밀어붙이자 당시 30대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한자리에 모여 재개정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또 30대 그룹이 광고비를 갹출해 노동법 개정의 문제를 알리는 대국민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회의 소집 등 실무를 담당했던 전경련 고용이 차장은 “노동법은 기업들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은 채 개정됐지만 기업들이 모두 선선히 광고비를 내줬다. 전경련 역시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다는 신뢰도 얻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회원사인 대기업들을 압박하는 정책들이 쏟아지는데 전경련은 뭐하느냐. 회비가 아깝다”는 항의가 쏟아지는 게 전경련의 현실이다.

 전경련 출신의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지난 10여 년간‘ 소통의 리더십’이 사라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사이 국민들의 성향이 달라졌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소통의 경로 역시 전에 없이 다양해졌다. 전경련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반기업 정서에 밀려 앞에 나서기를 꺼린 탓도 크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차갑다. 서울대 전성인(사회학) 교수는 “이젠 시골의사 박경철, 개그맨 김제동 같은 이들이 이 시대 소통의 상징으로 떠올랐다”며 “국민들이 전경련보다 이들을 더 믿게 됐다는 점을 전경련은 곱씹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양혁승(경영학) 교수는 “전경련이 양극화 해소와 대·중소기업 상생문화 조성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잡지 못하고 기업들의 이익만 챙기려 하는 한 국민들은 전경련 같은 대기업 단체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혁주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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