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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머슴 사회 벗어나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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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느 모임에 가든 “살기 팍팍하다”는 말을 듣는다. 소득은 제자리인데 물가만 뛴다는 세평(世評)으로 시작해 노후 불안감까지 더해지면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고 만다. 은행 빚, 자녀 교육비, 불안한 일자리. 한국 사회의 척추나 다름없는 40∼50대들이 흔들리는 이유다.

프랑스 유학을 7년간 다녀온 A씨(50)는 1996년부터 16년째 대학 시간강사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친다. 지난 1학기엔 주 9시간을 강의해 월 140만원을 벌었다. 그는 “방학 넉 달을 빼면 연봉 1000만원짜리 인생”이라고 자조한다. 그래서 3년 전 은행 대출을 받아 칼국수 식당을 열었다. 논술 과외교사를 하는 부인과 번갈아 가게를 지키면서 월 300만원쯤 번다.

중견 대기업의 고참 부장인 B씨(47)는 다음 달에 서울 잠실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 비워줘야 해서다. 그러면서 전세금은 3억1000만원에서 4억7000만원으로 올랐다. 연봉 7000만원인 B씨에게 가장 큰 경제적 부담은 중3 딸의 사교육비다. 여기에 전세금 대출이자(약 60만원)가 만만치 않아 한숨을 쉬는 게 잦아졌다. 사교육 1번지라는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세입자가 70%를 넘지만 전세금은 6∼7년간 두 배나 뛰었다.

이들은 이른바 베이비 부머 세대(40대 후반∼50대 초반)다. 이 세대는 어릴 때부터 한국 사회의 격변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학창 시절에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과 입시 지옥을 겪었다. 민주화 열풍, 부동산 투기, 금융 위기, 구조조정 등을 거쳤다. 그들은 ‘하면 된다’를 믿고, 개천에서 용이 된 성공신화에 의지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베이비 부머들의 좌절감은 요즘 위험 수준이다. 실직한 어느 친구는 동창회 모임 자리에서 “내가 100살까지 산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며 “노후를 생각하면 딱 일흔까지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 동안 흐르던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중국에선 몇 년 전 ‘팡누(房奴·아파트 노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빚 내서 아파트를 샀다가 궁핍한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을 풍자한 말이다. 노예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옛날 ‘머슴’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40∼50대들은 이중 삼중으로 머슴 신세다. 겁 없이 빌린 아파트 담보대출을 갚느라, 자녀 교육비를 대느라, 뜀박질하는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소처럼 일한다.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이들이 늘어간다.

한국 사회는 지금 총체적인 갈림길에 서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800만 명을 넘어섰고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청년 백수’와 ‘88만원 세대’는 젊은 세대의 고통지수를 말해준다. 하지만 그들을 거두는 가장(家長)은 베이비 부머들이다. 1000조원으로 추정되는 가계대출은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다. 대부분 베이비 부머들이 주택 구입·임대나 자녀 교육비를 대느라 빌린 돈일 것이다.

지난주 시작된 미국발 금융혼란 사태는 불길이 어디로 번질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맷집은 과거보다 훨씬 약해졌는데 말이다. 예컨대 한진중공업 사태는 우리 정치권이 갈등 조정의 리더십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100년 만의 폭우 피해가 발생해도 내년 총선·대선을 겨냥한 ‘네탓 정치’가 횡행한다.

80년대 후반까지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일본 경제가 무너진 건 바로 리더십 부재 때문이었다. 경제가 흔들리기 전에 정치가 분탕질을 쳤다.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사회대협약’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97년 겨울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맥없이 고꾸라진 경험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정치권부터 정쟁을 자제하고 가계 빚 감축, 교육개혁, 양극화 완화, 저출산·고령화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정치권이 못 하면 민간단체라도 나서야 한다. 그것이 베이비 부머들의 기(氣)를 살리는 길이다.

중앙SUNDAY 편집국장 대리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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