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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는 삶의 흔적이 담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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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형기
충북대 교수·지방자치학

우리나라에서 지명이란 장소나 위치를 식별하기 위한 단순한 표지가 아니다. 지명에는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인식과 언어, 생활양식이 용해돼 있고, 그 토지에서 살아온 삶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지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이 살아온 계보를 말해 주는 역사적 기념비다.

 우리나라 지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사와 풍토는 말할 것도 없고, 신화·전설·신앙·언어·경제활동에서부터 천문·기상·지질·식생(植生)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지명은 자의적이거나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없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불려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의 지명이란 역사의 기억장치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최근 도로를 기준으로 하는 ‘도로명 주소’를 법정 주소로 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도로명 주소를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도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이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우리도 그들과 궤를 같이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도 말이 된다. 내비게이션을 만들려고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면서 주소를 입력해야 하는 소모적 작업도 도로명 주소를 쓰면 훨씬 수월해진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국가의 고유 문화는 편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지 속에서 잉태된다.

 지명의 문화적 의미에서 우리와 서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이 허허벌판에 삽질하고 개발할 때 그곳의 유일한 기점은 도로와 건물이 전부였다. 도로를 기점으로 삶을 시작했던 사람들에게 지명이란 단지 위치를 식별하기 위한 표지일 뿐이었다.

 우리 지명은 우리 역사와 풍토를 이야기해 주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민생을 기점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우리나라 언덕·도로·하천·산 등의 오래된 지명은 그 자체로 선인들의 생활과 사상을 오늘에 전해 주는 기록이다. 일정한 토지에서 삶을 시작한 이래 세월이 흐르고 그 주인공은 바뀌어도 토지의 이름은 변함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지명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공동감정(共同感情)을 촉발하고 잉태시키는 것이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지역사회와 밀착되어 있고 지역의 혼(魂)이 깃들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지명은 수많은 세월과 시대의 양분을 흡수해 하나의 토지에 피는 꽃과도 같다. 지명이라는 꽃에는 무수한 음영(陰影)이 걸려 있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지명에는 무수한 사람의 원망(願望)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지명은 고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것이며, 그 속에는 지형과 역사 그리고 신앙 등 다양한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편리함을 추구하더라도 우리 고유 문화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 가치를 내동댕이치면서 편리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변경신청 기간을 조금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천 년의 이름을 살리려는 노력을 1~2년으로 마감해서는 안 된다. 편리함을 추구하더라도 본질적 가치는 최대한 살려야 한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지방자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