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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73) 성우의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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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청춘 스타 엄앵란의 목소리를 전담한 성우 고은정(맨 왼쪽)이 1960년대 한 시상식장에서 동료 연예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고은정 한 사람 건너부터 나비 넥타이를 한 가수 최희준, 한복차림의 레슬러 김일, 가수 이미자. [중앙포토]

1960년대 후반 한국 영화의 황금기는 영화배우와 감독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목소리의 마술사라 할 수 있는 성우(聲優)가 있었다. 특히 나와 엄앵란의 목소리를 전담한 성우 이창환·고은정도 큰 인기를 얻었다.

 TV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라디오 드라마에 열광했다. TBC·KBS·MBC·동아방송·기독교방송 등 주요 방송국들은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매 시간 별로 라디오 드라마를 편성해 앞다퉈 경쟁했다. 회당 20분씩 평균 30회 분량이었는데 청취률이 좋은 작품은 방송 1·2회가 나갈 때 원작이 팔려나갔다. ‘산 넘어 바다 건너’ ‘청실홍실’ ‘동심초’ ‘현해탄은 알고 있다’ ‘로맨스 빠빠’ ‘남과북’ ‘아낌없이 주련다’ 등이 라디오 드라마에서 영화로 각색된 작품이다.

 영화 제작은 후시 녹음, 즉 화면을 찍어놓고 거기에 성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시스템이었다. 영화 제작자들은 당연히 인기있는 성우들을 후시 녹음에 기용했다. 당시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에선 서울말이 쓰였는데 표준말을 훈련한 사람은 아나운서나 성우 정도였으니 그들에 대한 수요가 엄청났다.

 나와 엄앵란 목소리를 도맡던 이창환과 고은정을 비롯해 각 분야에 자타가 공인한 전문가가 자리잡았다. 아버지 역 주상현, 어머니 역 천선녀, 여주인공은 고은정과 정은숙, 이승만은 구민, 낭독 전문은 윤미림이 독보적이었다. 지금은 탤런트·배우가 된 김성원·변희봉과 경상도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전운 등도 성우로 이름을 날렸다.

원래 내 목소리를 담당한 사람은 성우 김영배였다. 그의 목청은 바리톤에 가까웠다.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내 목소리를 맡은 이가 김영배다. 안타깝게도 그는 과도한 작업으로 병을 얻어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 바람에 젊은 목소리를 지닌 이창환이 내 전담이 되다시피 했다. 70년대 이창환이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내 목소리는 서너 명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엄앵란·고은아·문희·윤정희·남정임 등 여주인공 목소리는 고은정과 정은숙, 두 사람이 양분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을 지경으로 두 사람의 목소리는 하늘이 내린 천부적 재능이었다. 괄괄하고 술이 취해 울면서 넋두리하는 역으론 고은정을, 조용히 앉아서 흐느끼는 역으론 정은숙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작품 캐릭터에 맞춰 기가 막히게 변성했다. 고은정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돈만 주면 세 살 어린아이부터 팔순 노인네 목소리까지 다 낼 수 있다.”

 이창환과 고은정은 가수 납세 랭킹 1위인 이미자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녹음실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방음벽과 방음문으로 밀폐된 공간에 감금된 상태로 담배 연기를 다 들여마셔야 했다. 손 때 묻은 18㎜ 러시 필름(rush·편집된 필름) 화면을 보느라 눈이 나빠지고, 목이 갈라지고, 촉박한 스케줄로 인해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맨발의 청춘’의 경우, 전체 촬영 기간이 18일이었으니 후반 작업은 말 그대로 번개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진행됐다. 녹음실에선 얼마나 야단법석이 났겠는가.

제작진은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 오늘내일 하는 고은정에게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고은정은 녹음을 끝내고 바로 집에 가서 애를 낳았다고 한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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