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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71) ‘군번없는 용사’ 촬영 중 낙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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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만희 감독은 배우들이 어떤 상황을 만나든 두려움 없이 즐기면서 일하게 했다. 1966년 작 ‘군번 없는 용사’에서 형제로 출연한 신영균(맨 왼쪽)과 신성일(오른쪽에서 세번째). [한국영상자료원]


1966년 초 이만희 감독과 다시 뭉쳤다. 전쟁 영화 ‘군번없는 용사’. 그 첫 촬영지는 서울 충정로의 한 신학대학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맡은 인민군 장교 동생과 묘향산에서 활약하는 국군 유격대 부대장인 형(신영균)이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그 사이에서 아버지(최남현)가 갈등하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첫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훈련받은 내가 인민군 소좌로 부임하는 도입 부분이다. 나는 긴 장화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오버코트에 채찍을 든 검은 장갑으로 한껏 멋을 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학대 건물은 북한의 국가보위부 본부로 설정됐다.

 그 날 마침, 흰 눈이 푸짐하게 내려 있었다. 이 감독은 그림이 기막히다며 흥분했다. 말을 타고 본부 건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라갔다가 그 앞에서 멋지게 뛰어내리면 됐다. 크레인에 올라탄 카메라는 롱샷으로 눈 덮인 비탈길 장면을 잡았다. 인민군 복장을 한 난 겁 없이 말에 뛰어올랐다. 이 감독은 말 옆에서 주문했다.

 “신짱, 말 타고 빠른 속도로 올라가.”

 이 감독은 그 장면을 다이내믹하게 잡아내고자 했다. 나 역시 그 의도를 잘 알았다. 말은 속도를 냈지만 눈 덮인 비탈길을 제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말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말은 왼쪽으로 30도를 꺾으면서 빠르게 내달렸지만 곧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나는 말에서 떨어졌다. 사고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진 말이 가파른 비탈길에서 먼저 땅에 떨어진 내게로 굴러내려왔다. 그 육중한 말에게 깔리면 죽을 것 같았다. 몸을 날려 굴러내려오는 말을 신속히 피했다. 말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감독도, 나도 눈 깜짝 안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영화에 동원된 말은 뚝섬 경마장에서 나온 폐마다. 이 감독은 “더 튼튼한 놈 가져와”라고 소리질렀다. 그날 즉시 도착한 말은 팡팡 튀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알렉산더 대왕을 처음 태운 야생마 같았다.

 나로선 만족스러웠다. 나는 “슛 갑시다”라고 외치고 말 고삐를 잡았다. 타 보니, 역시 힘차고 거칠었다. ‘레디 고’ 소리와 함께 촬영에 임했고, 단번에 ‘OK’를 받았다. 이 감독은 화면 속에서 나를 최고의 멋쟁이로 만들어주었다.

 내가 인민군 장교로서 너무 멋지게 그려진 것이 문제가 됐다. 이 감독은 65년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으로 걸리는 통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지독하게 혼 난 적이 있었다. 이번엔 ‘군번없는 용사’로 호출을 당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추궁받은 내용을 내게 털어놓았다.

 “신짱,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신성일은 한국 최고 개런티를 받는 최고 인기 배우입니다. 신성일이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멋있지,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멋있었겠습니까?”

 다행히 이 감독은 무탈하게 풀려났다. 또 한 가지 살펴볼 부분이 있다. 70년대 초부터 가수 윤복희가 입은 미니스커트가 여자들에게, 맥시코트(긴 코트)가 남자들에게 유행했다. 결국 ‘군번없는 용사’는 그 유행이 오기 전에 맥시코트를 소개한 선구적 영화가 됐다.

 68년 역시 이 감독과 촬영한 ‘창공에 산다’에선 공군 파일럿 복장으로 인기를 얻었으니 나야말로 시대를 앞선 패셔니스타 아닌가 싶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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