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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울릉도 지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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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유치환의 시 울릉도)

 애달픈 막내란 비유가 썩 어울리게 울릉도는 수많은 애환이 서린 섬이다. ‘우산국(于山國)’으로 불리며 삼국시대까지 독립을 유지했지만 512년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이곳을 침공하면서 운명이 달라진다.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쳐들어가 말을 안 들으면 이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 섬사람들을 굴복시켰다. 뭍과 섬 간의 조공관계는 고려 초까지 계속된다.

 하나 11세기 초 여진족이 울릉도를 약탈하기 시작해 상황은 급변한다. 섬 주민들이 본토로 도망쳐 온 뒤 울릉도 전체가 고려의 직할 영토로 바뀐 것이다. 울릉도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 초엔 쓰시마인들이 이 땅을 넘봤으며 왜구의 침범도 극심했다. 결국 태종은 섬 주민 모두를 본토로 이주시키고 울릉도 전체를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단행한다. 호시탐탐 울릉도를 노려온 일본인들이 이런 노마크 찬스를 노칠 리 없었다. 신바람 난 일본 어부들은 대놓고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했다. 조선 어부들이라고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천혜의 동해 어장을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자연 울릉도 일대에선 양국 어부들 간의 충돌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이런 혼란을 끊고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소유권을 확립한 이가 있었다. 사후 장군으로까지 추대된 안용복(安龍福)이란 어부다. 일본과의 왕래가 잦았던 동래에서 자란 덕에 일어에 능숙했던 그는 1693년 울릉도에서 조업 중 일본 어부들에 붙잡혀 시마네현 오키시마로 끌려간다. 영어의 몸으로 기가 꺾일 만도 했건만 그는 시종 당당했다. 그는 정연한 논리로 일본 막부와 담판을 벌여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받은 후 이에 대한 증명서까지 받아낸다. 독도와는 달리 울릉도 영유권에 관한 한 일본 측에서 별 시비를 걸지 않는 것도 안용복이란 지킴이 덕분인 셈이다.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와 안용복 충혼비는 이 섬 약수공원에 나란히 서 있다.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들쑤시기 위해 1일 울릉도 방문을 시도한다고 한다. 정부 측에선 이들을 공항에서 돌려보내기로 한 모양이다. 독도 사태가 어떻게 풀릴진 모르겠지만 과거 한 어부의 충절이 울릉도를 지켜냈듯,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 독도 수호의 밑거름이 될 거란 점은 또렷해 보인다.

남정호 jTBC 특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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