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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꼼수의 끝은 퇴장 명령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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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제1차 세계대전 때 ‘슐리펜 플랜’이란 게 있었습니다. 1905년 독일군 참모총장이었던 알프레드 폰 슐리펜 백작이 세운 전략입니다. 러시아와 프랑스 두 강대국 틈에 끼어있던 신흥 독일제국이 두 나라와 양면전을 벌이기 위한 회심의 비책이었지요. 간단합니다. 먼저 지리적으로 가까운 프랑스를 공격해 괴멸시킨 뒤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전쟁이 나도 철도망이 부실한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데는 6주 이상 걸린다는 계산이 깔려있었죠. 그 사이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여 프랑스를 장악한 다음 다시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옮기면 러시아쯤은 손쉽게 막아낼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1914년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 슐리펜의 후임자인 헬무트 폰 몰트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군이 로렌 지방으로 반격해올 경우 독일군 옆구리가 위협받을 걸 우려했지요.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많은 병력을 방어에 투입했습니다. 슐리펜 플랜의 성패를 가름할 전격 진공작전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요.

 그렇지 않았더라도 슐리펜 작전은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군사적 측면만 고려했지 정치외교적 상황은 간과했던 까닭입니다. 슐리펜 플랜대로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하자 영국이 참전을 선언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일이 커진 거지요. 서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독일은 또다시 무리수를 둡니다. 유럽 대륙과 영국을 오가는 상선들을 공격하는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칩니다. 독일은 영국이 반 년 내에 백기를 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역효과만 불러왔을 뿐입니다. 미국 상선의 침몰을 계기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게 되거든요. 전략적 실수와 무리수가 반복되면서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고 만 것이지요.

 슐리펜 플랜에는 무리수보다 더 큰 치명성이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집단사고 말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이 두려워 섣불리 도발하지 못했던 독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슐리펜 플랜이란 그릇된 묘수를 믿고 겁이 없어진 겁니다. 양면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필요하다면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는 설익은 자신감을 갖게 된 거지요.

 연일 서양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머독 스캔들’에서 슐리펜 플랜의 그림자를 봅니다. 문제가 된 타블로이드 신문의 묘수는 전화 해킹이었습니다. 유명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살된 소녀에서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진 병사들, 9·11 테러 희생자들의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마구잡이로 해킹을 했습니다.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걸 캐낼 수 있다면 가릴 게 없었지요.

 꼼수는 무리수를 낳기 마련입니다. 마약처럼 끊임없이 복용량을 늘려야 하지요. 그래서 기자들이 사설탐정을 고용하기도 하고 경찰을 매수했으며, 심지어 총리의 선거 운동에까지 관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집단사고였습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낄 수 없었겠지요. 불법행위를 독려한 흔적조차 나타납니다. 경고를 발한 조직원은 해사 행위자로 따돌림받았습니다. 결국 1차대전 당시 세계 최강이던 독일이 꼼수와 무리수로 패배자가 됐듯, 168년 역사를 가지고 300만 부를 찍던 신문 역시 꼼수와 무리수를 쓰다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미봉책이란 원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빈틈없게 만든 전투 포석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춘추시대 주 환왕이 정나라 장공을 토벌하려고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장공이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전차와 전차 사이의 빈틈을 보병으로 연결하는 ‘오승미봉(伍承彌縫)’의 전법으로 약세를 극복하고 토벌군을 무찌른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처럼 ‘임시변통의 꼼수’ 정도로 의미가 바뀌었을까요. 당시 전투에서 나온 장공의 말 속에 해답이 있고 교훈이 있습니다.

 승기를 잡은 장공의 군대가 도주하는 연합군을 계속 추격하려 하자 장공은 이를 제지합니다. “군자는 약세에 몰린 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하물며 천자를 무시하겠느냐. 본시 자위를 위해 나선 만큼 나라의 안전만 보장되면 족하다.”

 미봉책으로 한두 번 전투에서 승리할 순 있어도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얻으려면 그에 걸맞은 진정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자신은 그에 못 미친다는 걸 안 거지요. 그런데도 장공과 다르게 많은 사람이 모든 걸 얻기 위해 미봉을 남용하다 보니 오늘날 꼼수의 의미가 돼버린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궁극적 승부는 꼼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꼼수를 되풀이하다간 곧 퇴장 명령을 받게 될 뿐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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