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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코드 2000] 중년들의 '하루 일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5일 일산 신도시 주엽역 자정 무렵. 불콰한 얼굴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중년 여성들과 남성들이 성인 나이트 클럽에서 짝을 지어 나온다. 물론 그 늦은 시각에도 남자는 남자들 끼리 여자는 여자들 끼리 들어가는 손님들도 있다.

'부킹 100% 보장' 이라는 전단도 여기 저기 흩날린다. 일산 지하철 역세권마다 대형 성인나이트클럽.모텔.노래방.주점과 식당이 어우러져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골프장 예약 등에 쓰이던 부킹이 이제 나이트클럽에서 중년 남녀 짝짓기의 대명사가 됐다. 예전의 관광버스 안에서나 관광지에서의 '묻지마 관광' 을 압도하며 나이트클럽의 부킹이라는 짝짓기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성인나이트클럽에 들어가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나면 웨이터가 이내 묻는다. 여자 친구가 필요하냐고. 그러면 여자들만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 웨이터가 귀엣말을 하고 손을 이끌어 남자 손님 자리로 이끈다. 여자 손님들을 이끌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로 부지런히 하룻밤 향락을 '중매'하는 풍경이 홀 곳곳에서 어지럽게 연출된다.

성인나이트클럽은 일산.안양.부천 등 주로 수도권 도시에 밀집돼 호황을 누리고 있다. 수안보 온천 등 온천단지 주변 나이트클럽은 전국에서 모인 손님들로 붐비며 '전국구'로 통한다.

부킹을 위주로한 나이트클럽은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 30~40대가 주고객을 이루며 확산일로에 있다.

여종업원에 대한 팁과 술값이 만만치 않은 룸 살롱 등 고급유흥업소들이 찬바람을 맞은 대신 낯선 남녀들이 만나 춤추고 술마시고 즐길 수 있는 이런 업소들이 호황을 누리게 된 것. 이에 자유로운 이성 교제를 원하는 기혼 여성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것이 부킹의 성황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일부 대형나이트클럽에는 인기연예인도 출연하고 매끄러운 대형 플로어도 있지만 정작 손님들의 대부분은 부킹을 위해 이 곳을 찾는다.

70, 80년대 나이트클럽에도 부킹은 있었다. 손님들 중 일부 젊은 남자들이 젊은 여자들만 앉아있는 테이블에 웨이터의 주선을 통해 합석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일부 청춘남녀의 나이트클럽에서의 행태를 전문화해 30~40대 유부남.유부녀들을 주고객으로 한 중년나이트클럽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손님들 중 70~80%가 부킹에 성공하고 있으며 노래방 등의 2차는 물론 모텔 등 3차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소위 386세대 주부들은 친구들끼리 와 마치 대학시절 미팅 하듯 거리낌 없이 부킹해달라고 먼저 청하는 경우도 있다" 는 게 일산 J나이트클럽 웨이터의 말.

30대후반으로 접어들며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도 많다.

배우자가 모르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부킹은 그런 중년의 성적 불만족을 해소하는 출구가 될 수 있다" 고 한 여성손님은 밝힌다.

때문에 부킹에서 상대방의 신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묻지마' 라는 익명성이 불문율이다. 다음의 만남을 위해서도 집 전화가 아니라 핸드폰이 통신수단이다. 신분노출을 극히 꺼려 인접 도시로 원정부킹에 나서는 주부도 많다.

학교나 직장 등의 신분을 떳떳이 밝히는 미팅에 비해 철저하게 익명에 가려진 부킹은 사회적 물의를 부를 건 뻔하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박사는 "부부가 함께 하는 문화가 부족한 30~40대 현실이 부킹이라는 기형적 문화를 나았다" 고 보았다.

나아가 "익명성에 의존, 죄책감 없이 혼외정사를 즐기는 것은 큰 문제" 라고 비판한다.

이박사는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 "무분별한 혼외정사를 통한 성병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고 알고는 있지만 사회적 지위나 체면상 이혼은 못하는 남편과의 거리감을 상담하는 환자들도 있다" 고 밝혔다.

이런 부킹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채팅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대화하다 실제로 만나는 경우도 많다.

'나를 즐겁게 해줄 유부남 구함' '만나서 즐길 미시' 같은 선정적 제목의 20~40대 짝짓기 사이트도 기승을 부린다.

또 최근에는 미팅.채팅(대화).배팅(내기)을 결합한 인터넷 서비스도 선보이고 있다. 몇 쌍의 남녀가 출연해 방청객 앞에서 서로를 탐색하다 짝을 찾는 TV 프로그램 〈사랑의 스튜디오〉와 같은 방식이나 네티즌이 스스로 참여할 수 있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짝 맞추기에 내기를 걸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의 짝맞추기는 이제 공개된 장소에서는 오락화, 익명성의 공간에서는 불륜을 잉태할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다.

남자들에게만 밖에서 접대문화 등으로 성적 일탈이 열려 있는데 이제 여성들도 성적 불만 해소 기회를 적극적으로 밖에서 찾아나서고 있다.

이런 성적 일탈의 사회현상에 대해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인 철학박사 이정우씨는 "시공에서 자유로운 사이버 시대에는 사회적.가정적 질서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다" 며 사이버 시대의 새로운 윤리 모색을 강조했다.

이박사는 이어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독신으로 자유롭게 살고, 가정을 꾸렸으면 가정을 지켜야 되는데 가정도 갖고 자유도 구가하는 한국사회의 2중성이 문제" 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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