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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중국,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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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

“천빙더(陳炳德·진병덕) 중국군 총참모장이 우리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10여 분간 미국을 비난하는 외교적 결례를 했다지요. 저는 그 뉴스를 듣고, 역사학자로서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청 태조)가 명(明)에 선전포고를 할 무렵 조선에 보낸 편지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강의였다. 나는 지난 18일 저녁 역사전문 출판사 ‘푸른역사’의 부설기관 ‘푸른역사 아카데미’가 마련한 역사 특강 첫 시간에 참석했다. 미리 예고된 주제(‘G2 시대에 다시 읽는 조선시대의 국제관계’)와 강사(한명기 명지대 교수) 이름을 보고 강의에 탐을 냈다. 적지 않은 참가료까지 지불했기에 모두 4번의 강의에서 꼭 본전(?)을 뽑으리라 작심하고 있었다.

 후금은 1618년 명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후해 조선을 ‘너’라고 호칭하는 국서를 보내는가 하면 명과의 전쟁에 조선은 끼지 말라고 종용한다. 조선은 난처한 와중에 그나마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로 버틴다. 그러나 인조대에 들어 힘도 없는 주제에 후금을 거스르다 정묘호란(1627년)을 당하고, 이어 병자호란(1636년)이라는 훨씬 참혹한 재앙을 맞는다. 인조는 한겨울에 남한산성을 나와 청의 홍타이지에게 큰절 세 번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한바탕 승자들의 파티가 끝나고 홍타이지가 갖옷을 선물로 내리자 인조는 다시 “감사합니다”라며 두 번 무릎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린다(삼전도 굴욕). 왕이 이럴 정도니 일반 백성의 참상은 말할 것도 없다. 청에 끌려간 포로만도 최대 50만 명. 도망치다 잡혀 발꿈치를 잘린 포로도 부지기수였다. 청에 끌려가 성(性)노리개로 전락한 조선 여인들은 만주인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까지 받았다. 어렵게 고국에 돌아와서는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욕설의 원조가 되어야 했다. 그 이전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행패는 또 어땠던가. 백성들은 명군의 가혹한 수탈을 빗대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새로운 강국이 기존 패권국에 도전할 때 한반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위기가 닥쳐왔다”고 분석했다. 중국 대륙의 원·명 교체기, 16세기 일본의 굴기(<5D1B>起), 명·청 교체기, 근대의 청·일 국력 역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왜란·호란에서 국망(國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비극은 모두 기존 패권국과 신흥강국 사이에서 ‘관계’에 실패할 때 찾아왔다고 했다. 중국이 미국에 ‘맞짱’을 뜨기 시작한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행운 덕분에 우리가 못 겪어서 그렇지 조상들에게는 중국발(發) 수모가 거의 일상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오만과 무례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중국 사신을 황감하게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게 불과 115년 전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온갖 위세를 부린 것도 그즈음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의 임진왜란 참전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419년 뒤에 일어난 6·25 전쟁 참전은 ‘항미원조(抗美援朝)’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저하게 자국 위주로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예 나라를 통째로 빼앗아간 일본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냉전 시기 죽(竹)의 장막 탓에 중국이라는 수퍼파워를 그나마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그런 예외적인 시대는 끝이 났다. 중국·미국 사이에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조상들의 비극이 형태를 달리해 찾아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느 쪽이든 미국만을 상수(常數)로 삼아 국가 진로를 모색하던 시대는 저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천빙더 총참모장이 김관진 장관에게 보인 ‘결례’는 앞으로 결례 축에도 들지 않을지 모른다. 한명기 교수도 강의를 마무리하며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우리는 상당히 골치 아픈 시간들을 앞두고 있다고 봅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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