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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갈석산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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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고 전하고 있다. 그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에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아직도 황해도 수안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기 207년 위(魏)나라 조조(曹操)는 유성(柳城)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임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조조를 ‘뛰어난 정치가·군사가·시인’으로 재평가했던 모택동(毛澤東)이 좋아했던 시인데, 현재도 갈석산 중턱에 음각되어 있다. 시 중의 ‘동(東)’자는 동쪽 끝이란 의미였다.

 『사기(史記)』는 진시황의 통일 제국에 대해 “그 땅이 동쪽으로는 바다와 고조선까지 이르렀다(地東至海暨朝鮮)”고 말했다. 이때의 고조선은 어디쯤인가? 한(漢)나라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淮南子)』 ‘시측훈(時則訓)’에는 “동방의 끝 갈석산으로부터 고조선을 지난다(東方之極,自碣石山過朝鮮)”고 설명한다. 진시황을 비롯해 아홉 명의 중국 황제가 갈석산에 올랐던 이유가 고조선과 국경 부근이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조조가 바라본 창해가 지금 원유 유출로 시끄러운 발해(渤海)다. 근래 중국 쪽 사람들을 만나보면 갈석산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필자 등이 쓴 책을 보고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 때문에 ‘한강 이북은 중국의 역사영토였다’는 동북공정 핵심 논리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갈석산 서쪽의 광대한 영토가 되레 ‘한국 역사영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정사인 『북사(北史)』 ‘고종 문성제(高宗文成帝)’ 태안(太安) 4년(458)조는 문성제 탁발준(拓拔濬)이 동쪽으로 순행해 요서(遼西) 황산궁(黃山宮)에서 연회하고 다시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산 위에서 군신들과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갈석산이 황해도 수안이라면 강대했던 고구려 장수왕은 재위 46년(458) 문성제 일행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나 황해도까지 가는 것을 두 눈 뜨고 구경만 했다는 뜻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사』는 문성제가 잔치하면서 “갈석산의 이름을 낙유산이라고 바꿨다(改碣石山爲樂遊山)”고 전한다. 중국이 갈석산을 없앨 수 없다면 낙유산으로 이름을 바꿀지도 모른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