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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쿠폰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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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유방 확대에 쓰이던 실리콘이 발암물질로 지목됐다. 몇 년 뒤엔 가슴 속 실리콘 보형물이 터져 면역체계를 마비시킨다는 거였다. 미국선 유방 확대가 코성형, 지방흡입에 이어 셋째로 흔한 미용수술이었다. 한 해 150만 명 이상이 실리콘 덕에 가슴과 자존심을 세웠던 터였다. 분개한 피해자들은 84년 제조사 다우 코닝을 법정에 세운다. 결국 14년 공방 끝에 코닝은 수십억 달러, 즉 수조원의 보상을 약속한다. 국내 피해자 660명도 지난 2월 390만 달러(약 41억원)를 받아냈다. 미 집단소송의 전범(典範)인 실리콘 재판의 전말이다.

 집단소송은 피해자 일부의 승소 혜택이 같은 일을 당한 모두에게 돌아가는 제도다. 오래된 듯하나 실제 도입된 지는 얼마 안 됐다. 근세 시민사회의 개인주의 중시로 개별소송의 원칙이 지켜져온 탓이다. 그러다 38년 미국에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면서 이 제도는 힘 약한 개인들로 하여금 대기업과 맞설 수 있게 한 ‘정의의 칼’로 여겨져 왔다.

 물론 폐해도 간단치 않다. 변호사는 수백만 달러 이상을 챙기는 반면 피해자는 고작 수십, 수백 달러를 받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보상금 대신 그 회사 쿠폰으로 끝나기도 한다. 소위 ‘쿠폰 합의(coupon settlement)’다. 법정 스릴러의 지존 존 그리샴의 『불법의 제왕』도 그런 폐단을 다룬 소설이다. 기업의 불법을 알게 된 햇병아리 변호사가 거액의 수임료에 눈이 멀어 피해자와 회사 간 합의를 방해해 결국 망하게 하는 파렴치한 장면이 나온다. 이뿐 아니다. 회사 측이 이길 때도 많다. 여직원 160만 명의 성차별 문제를 걸어 월마트를 상대로 낸 사상 최대의 집단소송도 개시 10년 만인 지난달 회사 측 승리로 끝났다.

 그럼에도 집단소송을 역사적 제도라 칭송하는 이들이 적잖다. 승패를 떠나 성·인종 차별 같은 고질적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변혁의 기폭제가 된다는 거다.

 최근 아이폰의 위치정보 수집 논란과 관련, 한 변호사가 위자료 100만원을 받자 하루 1만 명 이상이 참여할 정도로 집단소송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다. ‘척지지 말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때 원고는 ‘원(元)’, 피고는 ‘척(隻)’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한다.

집단소송이 어찌 되든, 사생활 보호문제로 애플이 한국 소비자에게 더 이상 척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뜻 깊지 않을까.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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