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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뽀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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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파일럿 모자와 고글을 쓴 펭귄.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주인공 뽀로로다. 2003년 탄생해 세계 100개국 이상에 수출됐다. 브랜드 가치만 약 3900억원이다. 최근 네티즌들은 “뽀로로를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선정하자”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뽀로로의 머리글자 ‘P’는 평창의 ‘P’였다”는 농담도 돌았다. ‘미키마우스’의 캐릭터왕국 디즈니는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뽀로로 캐릭터에 대한 인수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고 한다. 최근 포털사이트 검색어 10위권에 이 펭귄이 등장한 연유다.

 ‘뽀로로 열풍’의 이유는 뭘까. 디즈니·켈로그 등의 마케팅을 맡았던 컨설턴트 댄 S 어커프에 따르면 아이들이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대략 네 가지다. 첫째는 ‘양육 동일화’다. 아이들은 뽀로로를 키우면서 정서적 안정을 얻는다.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6세까지 아이들이 꾸는 꿈의 80%가 ‘동물 꿈’이다. 동물을 통해 불안을 해결하는 거다. 이때 동물은 둥글고 편안하게 생겨야 한다. 생후 18개월부터 아이들은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선(線)을 위협 요소로 느끼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아 동일화’다. 아이들은 뒤뚱거리는 ‘2등신’ 펭귄을 자신처럼 느낀다. 이는 뽀로로와 친구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모방 동일화’로 이어진다. 더 그럴듯한 건 ‘역(逆)동일화’다. 캐릭터의 어두운 면에 끌리는 거다. 뽀로로는 친구의 소중한 장난감을 망가뜨리고, 애써 만든 남의 쿠키를 훔쳐 먹는다. 유아들에겐 일탈의 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뽀로로의 별명은 ‘뽀통령(뽀로로+대통령)’ 혹은 ‘뽀느님(뽀로로+하느님)’이다. 아이들이 지은 게 아니라 부모들이 붙인 별명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날로 높아지는 키즈 파워, 즉 아동의 구매결정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점에서다.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맥닐은 이미 1990년대에 현대 사회가 가부장제(patriarchy)와 모계중심사회(matriarchy)를 지나 ‘필리아키(filiarchy)’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어린이가 의사결정권을 갖는 체제인 필리아키는 자녀를 뜻하는 접두사 ‘fili-’에 계층·계급을 의미하는 ‘hierarchy’를 합친 말이다. 아이가 원하면 부모는 사줘야 하는 게 필리아키의 법이다. 국산 캐릭터의 약진이 기특하면서도, 지갑을 계속 열게 만드는 ‘뽀통령’과 ‘뽀느님’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것도 부모의 솔직한 심정 아닐까.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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