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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57) 장모와의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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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5년 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서 신성일·엄앵란 부부가 영화배우 문희(오른쪽)씨 등과 얘기하고 있다. 왼쪽에 코미디언 고(故) 이주일씨가 보인다. [중앙포토]


정면돌파. 내 특유의 문제 해결 방식이다. 결혼 직후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아내 엄앵란은 집을 떠났고, 매스컴은 우리의 별거를 보도할 태세였다.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우리의 결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일보 영화제(부일상) 시상식에 엄앵란을 데려가지 못하면 파경 기사가 터질 판이다.

 약 한 달 전인 1965년 6월 9일, 큰딸이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고영남 감독의 ‘이 세상 끝까지’ 촬영 중이었다. 김지미는 원효로 신필름 세트장에서 출산 연기를 했다. 극심한 산고로 몸부림 치는 김지미를 남편인 내가 지켜보는 장면. 그때 엄앵란이 친정집 인근 약수병원에서 아기를 낳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는 김지미의 귀에 “딸을 낳았으니 장차 무엇을 시킬까”라는 대사를 속삭인 뒤 공중전화 쪽으로 갔다. 전화를 걸어보니, 엄앵란 역시 딸을 낳았다. 현실과 영화가 그렇게 일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첫 아이에게 ‘경아(炅娥)’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는 여자 이름에 일본식으로 ‘자(子)’자를 붙이던 때였다. 딸 이름이 보도된 후, 동료 배우 이낙훈과 가수 패티김이 딸 이름을 ‘정아’라고 지었다. 훗날 소설가 최인호는 신문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 여주인공을 경아라고 지었다. 내가 출연한 ‘별들의 고향’까지 성공하면서 ‘경아’는 술집 아가씨의 대표적인 이름이 됐다.

 부일상 수상차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 진땀 나는 일을 겪었다. 엄앵란이 딸 아이를 업고 우리의 주례를 서준 오재경 국제관광공사 총재를 찾아가 별거 얘기를 전했다. 나는 오 총재의 혜화동 자택으로 불려가 따끔하게 야단 맞았다.

 “그래, 앵란이 하고 헤어지고 나서 배우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오 총재의 훈계는 내게 엄청난 압박이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오 총재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엄앵란을 집으로 데려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오 총재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나는 약수동 처가로 들어갔다. 장모는 마루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나와 엄앵란 사이를 가로막았다. 못 만나게 하려는 심중이 분명했다. 사위의 기를 확실히 꺾어놓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장모와 대치하고 있는 중에 딸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의 그림자가 안방 한지 문짝에 실루엣으로 비췄다. 영화적 효과를 잘 아는 아내는 자기가 안방에 있음을 은근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장모와는 더 이상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엄앵란이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경아 엄마, 내일 부일상 타러 가는데 아침 8시 김포비행장에서 떠나요!”

 엄앵란은 이렇게만 해도 모든 걸 알아들을 여인이었다. 나는 장모를 등 뒤로 하고 뛰쳐나왔다. 다음 날 아침 김포비행장에 가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서도 시상식에 혼자 설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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