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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소득 3만3000달러 국제도시 옥포 … 70여 개국서 모인 ‘작은 유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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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22면

경남 거제시에 자리 잡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바다 위에 떠 있는 ‘플로팅 독(floating dock)’에서는 한 척에 5000억원씩 하는 70m 높이의 드릴십 제작이 한창이다. 드릴십은 자력항해가 가능한 석유시추선이다. 조용철 기자

장관이다. 길이 300m를 넘나드는 배 십여 척이 나란히 만들어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구석이 있다. 해저에 원유 시추공을 뚫는 데 쓰는 5000억원짜리 드릴십은 배 높이만 40m, 12층 건물 높이다. 드릴탑까지 포함하면 높이가 70m에 달한다. 드라이독에서는 1만4000TEU급 컨테이너선 건조 작업이 한창이다. 길이 338m에 폭 48m인 이 배는 20피트(6m)짜리 컨테이너를 최고 1만4000개 싣고 시속 45㎞의 속도로 대양을 누빌 수 있다. 축구장 세 개를 길게 이어 붙인 크기의 배가 하루 1000㎞ 이상을 내달리는 것이다.

기업이 바꾼 지역사회,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르포

바로 옆에는 30만t급 초대형원유운반선(ULCC)의 뒷부분 반토막을 만들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대우조선해양(DSME)의 김형식 차장은 “이곳은 초대형 선박 두세 척을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규모”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독(dock)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큰 배를 만들려니 생산시설도 규모가 크다. 높이 121m의 골리앗 크레인이 미리 만든 선박 블록을 들어 독으로 옮긴다. 최고 900t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 한 번 왕복하면 전기요금만 150만원이 든다. 조선소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크레인선은 3600t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 지난해 천안함을 인양한 바로 그 배다. 거제도 옥포 바닷가 460만㎡에 자리한 이곳 대우조선소는 연간 70여 척의 상선과 대형 해양플랜트 4기를 만들 수 있는 세계적인 선박 건조 시설이다.

‘거제도 안의 지구촌’ 장관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후장대한 장비지만 조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사람이다. 인사총무팀 박영조 부장은 “대규모 라인을 가동하는 전자나 자동차와는 달리 조선은 사람이 팀 단위로 배에서 배로 옮겨다니며 작업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본사 직원만 1만2000명. 사내협력업체 직원까지 합치면 3만 명에 달한다. 26개 구내식당에서 삼계탕을 한 번 내려면 닭 1만5000마리가 필요하고, 하루에 소비하는 쌀만 80가마다. 이곳을 방문한 6일에도 회색 작업복에 흰 안전모를 쓴 직원들이 거대한 철강 덩어리 사이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예외 없이 같은 차림이다. 이 가운데 간간이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띈다. 박 부장이 “배를 발주한 선주사나 선박 제조 과정을 감독하는 선급사 직원”이라고 알려준다. 대부분 외국인이다. 미국·영국·브라질 등 낯익은 나라 사람들이 많지만 말리·아제르바이잔·트리니다드토바고처럼 익숙지 않은 나라 사람도 있다. 현재 대우조선에 와 있는 외국인은 55개국 1200명에 달한다. 협력업체에서 고용한 근로자까지 합치면 71개국 2100여 명이 한국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있다

외국인들은 유치원생에서 중·고등학생까지 180여 명이 다니는 옥포국제학교(OIS)와 외국인데스크를 운영하는 대우병원이 있는 옥포에 자리를 잡았다. 선주사·선급사를 관리하는 상선사업관리팀의 최수현 상무는 “옥포는 저녁에 나가보면 대우 작업복 입은 사람이 반, 외국인이 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제도 안의 지구촌’을 이뤘다”고 말했다. 거제시청의 전덕영 문화공보과장은 “대우·삼성 두 조선소에 근무하는 직원과 그 가족들에 농촌·어촌의 다문화가정까지 합치면 1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거제도에 거주하고 있지만 문제가 거의 없다”며 “조선소가 문을 연 뒤 워낙 오랫동안 외국인과 함께 살다보니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도 거제도 생활에 만족한다는 반응이었다. 인도 뭄바이 출신인 바룸 호라는 “거제도는 인도 음식점 두 곳에 네팔·파키스탄 식당까지 있을 만큼 국제화된 곳이라 지내기에 나쁘지 않다”며 “서울 이태원이나 부산보다 이곳이 더 편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외에도 말레이시아·싱가포르·호주 등에서 머물렀다는 그는 요즘 브라질 발레(VALE)사에서 발주한 40만t급 광물운반선 제작을 감독하고 있다.

호라는 외국인을 포용해주는 분위기와 광신적이지 않은 종교 환경을 한국의 장점으로 꼽았다. 그는 “인도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아들이 성균관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은 뒤 수원에서 직장을 잡았다”며 “형은 미국, 동생은 캐나다에 있는데 만족도는 내가 가장 높은 듯하다”며 “가능한 한 오래 머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2009년 한국에 온 영국인 마크 에스데일도 “유럽은 물론, 터키·중국·태국 등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외국인 클럽이 있어 별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매출 12조원, 영업이익 1조원 넘어
조선업체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제화의 진전은 지역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대우조선이 옥포조선소를 착공한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 종합준공식을 연 것은 1981년. 삼성중공업이 거제조선소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지난 때였다. 당시 거제도 인구는 10만9000명이었다. 주요 생산품은 멸치와 농산물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인구가 23만6000명에 228억 달러어치를 수출하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이 가운데 97.8%가 양대 조선소에서 배를 팔아 번 돈이다. 광역시도를 제외한 전국 지자체 중 아산과 구미에 이어 3위다. 2000년 3조원 수준이던 지역총생산(GRDP)은 2009년 9조7000억원이 됐다. 1인당 소득이 3만3000달러를 넘어 전국 최상위권이다.

이 같은 ‘국제도시’가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대우조선도 초기에는 근무 여건과 주변 환경이 모두 열악했다. 조립1팀에서 반장 10여 명을 거느린 직장을 맡고 있는 서석호 기원(技元)은 “80년대만 해도 현장에서 정강이를 걷어차이거나 뺨을 맞는 것은 물론, 선임자가 창고로 불러 ‘줄빠따’를 때리는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고 회상했다. 사고도 많아서 처음 취직할 때 부친이 “죽는다”고 말렸을 정도였다. 그는 30년째 대우조선에서 근무하며 기술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기원에 올랐다. 주변에 방이 없어서 소·돼지를 키우던 가건물을 보수한 월세방도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서 기원은 “80년 결혼한 뒤에도 신혼집을 마련하지 못해 몇 달 동안 기숙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회사 앞에 건물을 올리려고 터를 닦는 것을 본 그는 당장 집주인에게 달려가 계약금을 들이민 덕에 신접살림을 차릴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에는 혹독한 노사분규도 겪었다. 박영조 부장은 “골리앗 농성의 원조가 대우조선”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 분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며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올해로 19년째 무분규를 이어갈 정도로 노사 간의 신뢰 관계를 회복했다. 실적이 좋으면 그만큼 좋은 대우를 해 주고,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고 어떻게 헤쳐가겠다고 알리자 노조도 세계 조선경기 사이클을 따질 정도로 국제 감각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박 부장은 “덕분에 그룹이 해체되는 위기를 오히려 성장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 3조원에 미치지 못하던 매출은 2000년 독립 이후 급성장해 지난해에는 12조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 1조원 클럽에도 가입했다. 기업이 성장하자 지역 경제도 활기를 띠었다. 대우조선에서 매달 월급으로 나가는 돈만 1000억원꼴이다. 지역 토박이인 거제시청의 서점호 주사는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외환위기를 모르고 넘어간 곳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경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대우조선은 거제의 성공모델을 전남 지역에도 전파하려 한다. 이병모 대우조선해양 전무는 7일 전남 해남에 자리 잡은 대한조선의 신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달부터 3년간 대우조선이 대한조선을 위탁경영키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업계에서는 인수 예비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취임사를 통해 ▶추가 수주 ▶효율적 시스템 구축 ▶안전한 사업장 조성과 함께 ‘지역사회 공헌’을 경영 비전으로 제시했다. 옥포에서 30년간 갈고 닦은 노하우를 해남에서도 펼쳐 보이겠다는 각오다. 이철상 전무는 “거제는 기업이 잘되면 도시는 자연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며 “해남도 제2의 거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조선업은 중국에 쫓기고 있다. 2008년 이후 3년 동안 연간 수주 실적에서 중국에 뒤졌다. 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선업계의 시각이다. 이 전무는 “ULCC에 들어가는 부품은 100만 개에 달해 10만 개인 보잉747기보다 많다”고 말했다. 수준 높은 부품업체들의 뒷받침 없이는 고부가가치 선박을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포항 제철소에서 울산, 거제도를 거쳐 광양에 이르는 남서해안 J벨트 덕에 대우조선이나 대한조선은 100㎞ 이내에서 대부분의 부품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 올 상반기 전 세계 수주량의 50%를 차지해 30%에 그친 중국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대우조선도 올 1분기에만 매출액 3조원, 영업이익 4200억원의 좋은 실적을 거뒀다. 상반기에만 컨테이너선 22척 등 70억 달러어치를 수주해 연간 목표 110억 달러의 65%를 채웠다. 덕분에 6월 말 기준으로 2년 반 동안 작업할 분량인 353억 달러어치의 수주잔량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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