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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카터〉, 카터는 어떻게 스스로의 증오에서 해방되었는가

중앙일보

입력

이것은 실화(實話)다. 복서를 지망했던 한 흑인 청년이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증오를 키우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증오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에 관한, 실화다.

루빈 카터(덴젤 워싱턴)라는 흑인 소년이 있다. 그는 11살 때(1949년) 자신과 같은 또래의 흑인 소년을 성추행하려는 백인 노인을 칼로 찔렀다는 죄목으로 소년원에 감금되어 7년을 '썩는다.' 그곳에서 백인에 대한 증오를 서서히 키우게 된 카터는 몸을 단련하고 그 증오를 폭발시키기 위해 복싱을 시작한다.

그는 링 위에서 승승장구하지만 안타깝게도 백인 챔피언과 벌인 시합에서 압도적인 경기를 하고도 심판들의 불법판정(판정이 나오기까지 무려 30분 이상이 걸린)으로 타이틀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흑인 청년 두 명으로 밝혀지고, 당일 밤 자신의 팬과 차를 몰고 가던 카터는 경찰에게 연행된다. 그들은 혐의가 없음을 인정받지만, 3개월 뒤 경찰의 증거 조작으로 그들은 세 명의 백인 살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증거 조작의 주역은 델라 페스카(댄 헤대야) 형사. 그는 11살의 카터를 소년원에 보낸 바로 그 사람이다. 카터는 수감되지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수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자서전 성격의 책으로 담아 출판한다(1974년). 제목은 『제 16라운드 The Sixteenth Round』.

이 책이 중고서점을 통해 캐나다에 사는 흑인 소년 레스라(비셀로스 레온 샤논)에게 들어간다. 그는 카터의 삶에 공감과 감동을 느끼고, 함께 사는 백인들(환경운동가)에게 카터를 도와주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카터는 그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허리케인 카터〉는 여러모로 감독인 노만 주이슨의 67년작 〈밤의 열기 속으로 In the Heat of the Night〉을 연상시킨다. 흑인 형사가 여행 중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뛰어 든다는 스토리를 가진 이 작품은 인종차별주의를 직접적이면서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60년대 미국의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였던 흑인 민권운동이 작용하고 있다.

덴젤 워싱턴 스스로도 이번 72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지명받으면서 첫 코멘트를 "마치 내가 시드니 포이티에(〈밤의 열기 속으로〉의 주연 '흑인'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당시 이 영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시드니 포이티에가 아닌 백인 보안관으로 나왔던 로드 스타이거가 받았다.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허리케인 카터〉는 인종차별주의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이 점이 〈밤의 열기 속으로〉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영화는 좀 더 루빈 카터, 개인에게 접근해 들어간다.

그것은 카터가 흑인으로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가와 어떻게 백인을 증오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것이 레스라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되고 그는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접근이다.

즉 영화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극이라기 보다 "곤경(인종차별과 그로 인해 더 깊어진 증오심)"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이겨왔는가를 다룬 인간 드라마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영화의 성격에 맞게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역시 호연을 보여준다.

복싱 선수가 주인공이지만, 영화 자체가 복싱에 관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복싱 장면은 세 씬이 등장한다. 노만 주이슨 감독은 링 안으로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 들고 찍기(핸드 헬드)로 장면들을 찍어 내고 있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복싱 장면들은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 Raging Bulls〉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허리케인"은 주인공 루빈 카터가 복싱 선수로 현역에서 날릴 때 별명이며, 미국인들은 흔히 이렇게 별명을 이름 중간에 넣어 부르곤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40분. 3월 18일 개봉.

[사족]

〈밤의 열기 속으로〉에 등장했던 로드 스타이거(이제는 노장 배우가 되었지요)는 〈허리케인 카터〉에서도 막바지에 아주 중요한 역할(판사)로 등장합니다.

골든 글로브에서 덴젤 워싱턴은 상을 받을 때 루빈 카터(그의 나이 올해 63세다)를 대동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워싱턴이 상을 받는다면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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