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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적 가치는 편안,소박? 예술이 뭔지 모르고 하는 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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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호 08면

1 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원 원장.

그의 도자기는 색다르다. 조각적이며 건축적이다. 둥글지 않고 모났다. 유려한 ‘굴곡의 미’ 대신 절도 있게 각이 진 ‘굴절의 미’다. 소박하거나 여유롭지 않고 꽉 차 있고 완결적이다. 다양하되 품위 있는 색의 변화가 현란하다.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에 수놓인 문양과 색채, 사용된 기법의 조합은 무한대다. 가야 시대 마상배를 모티브로 한 막걸리 잔과 병. 역시 마상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의 거치대 위에 크고 작은 색색의 마상배 잔이 올라앉은 모습은 하나의 모던한 추상조각 또는 비례가 잘 갖춰진 탑의 이미지다. 기암절벽 형상의 침향로에 불을 붙이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연기와 함께 그윽한 향이 실내에 감돌고, 눈과 코가 동시에 호사를 누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각지고 현란한 도자기 만드는 광주요 도자문화원 조상권 원장

이 새로운 도자기들은 광주요 도자문화원 조상권(75) 원장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고 조소수 광주요 초대 이사장의 장남으로 프랑스 국립미술대학에서 수학(1963~67)한 전도유망한 건축학도였지만 1967년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불행한 역사 속 30여 년을 해외에서 떠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귀국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도예에 뛰어든 그는 13년 동안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창의적인 작업을 계속하며 한국 도자문화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2 사각진사주전자와 청자물컵, 편육각색유설탕기와 청자프림기.

그의 작품들은 국내보다 유럽에서 주목 받고 있다. 올해 프랑스 미술전문잡지 ‘유니베데자르’ 2월 호에 소개되어 현지 평론가들의 관심 속에 내년 봄 파리에서 개인전을 계획 중이다. 그에 앞서 17일부터 7월 3일까지 서울 통의동 갤러리 팔레드서울에서 프랑스 화가 장마리 자키(Jean-Marie Zacchi) , 김중식 화백과 함께 ‘한불작가전’을 열고 있는 그를 경기도 이천 작업실에서 만났다.

-거침 없는 스케일과 독특한 형태에서 건축적인 조형미가 느껴집니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오랜 세월 예술과 무관하게 살아왔는데 늦은 나이에 도예를 시작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는지.
“전통의 미가 살아 숨 쉬는 건축을 만들고 싶었던 못다 한 꿈을 도자기에 실현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건축 전공이라도 조각과 회화 또한 필수 과목이었고, 당시 지도교수가 건축보다 조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할 정도로 조형적 감각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도예에 겁 없이 뛰어들었죠. 가장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꿈이지만, 민족혼이 담긴 차별화된 도자기를 창작하는 일이 쉽지 않네요. 하지만 유럽에서 제가 받은 교육은 철저히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었거든요. 창의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단련이 돼서인지,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것 같아요.”

3 마상배 형태의 청자 막걸리 주전자와 진사막걸리잔.

-작품에 탑의 이미지가 많이 보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은 거의 분실되거나 소실됐고 남아있는 것은 석탑과 도자기 정도입니다. 탑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조상의 조형미는 굉장히 뛰어난데요,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보세요. 비례와 균형의 조형미가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 정제되고 세련되고 힘있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참모습이라 생각하기에 제 작업에도 그런 가치를 반영하려는 겁니다.”

-정제되고 세련된 고려청자보다 소박하고 여유로운 조선백자에서 한국적 미를 정의하는 경향이 대세 아닌가요.
“그것은 하루빨리 걷어버려야 할 식민사관의 잔재입니다. 학계와 언론에서 심각하게 다뤄야 할 문제인데요. 우리 미의 가치가 긴장감이 없는, 편하고 소박한 데 있다는 견해는 예술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창작이란 게 뭔가요. 예술의 가치는 자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데 있는데, 긴장감이 없다면 그게 예술입니까? 세계 어딜 가나 민중 속에서 나온 것은 소박하고 질감이 있고 해학적이죠. 우리의 미를 ‘무작위의 미’라고 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이 아닌 단지 오랜 숙련에서 나온 것에 가치를 두고 마치 그것이 우리의 전부인 양 얘기했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고대 미술은 대부분 백제의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겐 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고려 초기까지의 찬란하고 우아하며 정제된 귀족문화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련되고 깊이 있던 시대의 완성도 높은 문화유산이야말로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우리가 진정 이어가야 할 가치로서 주목해야 합니다.”

-에스프레소 잔과 막걸리 잔의 다양하면서도 품위 있는 색채가 인상적입니다. 총천연색을 구사하는 상회기법도 익히고 계신데, 화려한 장식미와 전통도자의 만남이 잘 조화가 되는지요.
“우리도 이제 색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본은 도자기에 색을 3만 가지나 구현한다는데 지금 우리의 현주소는 원시 상태나 마찬가지죠. 일단 색을 구사하려면 소박하거나 해학적인 것은 맞지 않아요. 다만 색의 세계로 접근하려면 우리 조상들의 기법과 일정한 문양 속에 담아 점차 끌고 가야 반발이 없습니다. 에스프레소 잔은 원래 서양 것이지만 박지ㆍ상감ㆍ인화 등 우리 기법을 사용하고 목단문ㆍ국화문 등 전통적인 문양 안에 색을 집어넣음으로써 점차 색의 세계로 접근해간 것이라 외국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반응이 좋습니다.

일찍이 백자와 청자를 다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우리밖에 없었는데 조선후기 타문화 수용에 폐쇄적이 되면서 우리 도자문화가 뒤처지게 되었어요. 우리만 상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영향이 크죠. 가야부터 고려 초까지 그 옛날에도 서양문물을 수용하고 응용할 줄 알았던 것은 그만큼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오픈했기에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상회도 단순히 하나의 기법이고, 원래 동양 것인데 우리가 수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도자문화 전반이 얼마나 발전했을지 아쉬울 따름입니다.”

-최근 한식 세계화가 화두인데, 음식뿐 아니라 식기도 따라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한식 세계화에 있어 식기 디자인의 방향성을 어떻게 봅니까.
“한식이 세계화되려면 고급화되어야 하고, 식탁에서 격 있고 품위 있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스토리가 있는 식기가 개발되어야겠죠. 막걸리만 해도 가야와 고구려의 스토리가 살아있는 마상배 잔에 담아 마시면 생활 속에서 문화를 즐기는 셈이 됩니다. ‘넘치지 않게 분수에 맞게 살라’는 교훈이 담긴 계영배에 술이나 차를 담아 식탁에 올리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충분히 여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죠.”

-형태나 색채 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계신데, 21세기 한국도자문화의 비전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무한경쟁시대에 각 공동체들이 생존하려면 차별화된 문화로 승부할 밖에요. 내 역사, 내 환경 속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표상으로 경쟁해야 합니다. 안데스산맥에서 피는 꽃과 금강산에서 피는 꽃이 다르기에 아름답지 않은가요? 내 안에 응축된 5000년 역사 속에 내재된 가치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관건이죠.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전통적 미인지 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겠고, 그러려면 고전을 제대로 바라보는 역사적 작업이 잘 정리되어야 할 겁니다.”

조상권 원장은 올 10월에는 다도로 유명한 전라도 광주 무학사에서 초대전을 열고 일본식 다도가 아닌 우리 나름의 기품 있는 차 생활 안착을 위해 새로운 다기 세트를 제안할 예정이다. 오래된 우리의 ‘고전’에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의 도전이 빛나는 것은 우리 것만 지키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우리 것을 더 낫게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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