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의동생 서울 데려와 20년 만에 재회한 김용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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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년 만에 동생 김대현씨(오른쪽)와 조카 딸(왼쪽)을 만난 탈북 방송인 김용씨. 그는 자신의 식당사업 노하우와 남한 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방법을 동생에게 전수해주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모란각’등 냉면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16일 오후 경기도의 한 냉면집.

 “오니까 참 좋네요. 꿈 같아요.” “정말 보고싶었다.”

 중년의 두 남자가 바깥 날씨보다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형은 외식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탈북 방송인 김용(51)씨. 동생 김대현(47)씨는 친동생은 아니지만 태어나자마자 김용씨 집에서 한 이불 덮고 자란 사이여서 정으로 치면 친형제나 다름 없다.

 북한 노동당 중앙당에 들어간 것은 동생이 먼저였다. 평양상업대를 졸업한 대현씨는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일했다. 구두에 흙 묻힐 일이 없었고 옷은 늘 양복을 입었다. 하지만 1991년 10월 형이 남한으로 오면서 동생의 인생도 달라졌다. 자강도 만포로 쫓겨난 뒤 줄곧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동생은 “이력서를 ‘기만(허위 기재)‘했다는 이유로 동료가 총살 당하는 것을 봤다”며 탈북 계기를 털어놨다. 김씨에게 대현씨 지인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동생의 생년월일과 자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말해 “맞구나” 직감했다. 한 달 반쯤 뒤 동생에게 직접 전화가 왔다.

 “(울면서) 형님 나야. (탈북할) 준비가 됐어.”

 “중국이나 일본에서 함께 살자.” 동생이 한국행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안심시켰다.

 형은 이때부터 자신의 중국 내 인맥을 총동원했다. 대현씨는 딸(14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다. 동생의 아내는 몇년 전 사고로 숨져 동행하지 못했다.

 북·중 국경을 무사통과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많은 탈북자들이 국경 주변에서 잡혀 다시 북송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생 부녀는 선양(瀋陽)을 거쳐 지난해 말 태국·라오스 국경에 도착했다. 형은 동생을 20분 가량 만났다. 바로 난민수용소로 보내 재판이 시작돼야 망명 절차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여겨서다.

 형은 평소대로 모자·선글라스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동생을 만났다. 이런 행색에 놀란 동생은 “형님은 뭘 해먹고 사는 사람이에요? 꽃제비(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북한 은어) 아니에요. 형님 믿고 딸까지 데려왔는데 함께 가도 돼요?”라고 물었다.

 지난 1월 동생이 마침내 서울에 왔다. 동생이 조사와 국내 적응 교육을 받는 동안 형은 하루가 1년 같았다. 김씨는 “(자신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20년간 배운 것을 동생에게 1년으로 단축해 가르쳐주겠다”며 “화장실·엘리베이터 매너부터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방법까지 낱낱이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냉면사업으로 한해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다.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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