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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랩으로 ‘환경의 역습’ 경고  공일오비, 시대의 금기를 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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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호 10면

이제는 환경 문제가 우리가 마주한 최대의 고민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환경 문제의 공론화는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환경 캠페인은 그저 산에 가서 쓰레기 줍는 일 정도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는 산성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근대화와 세계화의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가기에 바빠 공기나 물 따위는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민중가요권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노래가 간간이 나오고, 1988년 이후 민중가요권으로 몸을 옮긴 정태춘도 공연에서 ‘버섯구름의 노래’(1989)라는 핵 폭발을 경고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보수적인 여론까지 대대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대중가요계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표하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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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계에서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하기 시작한 것은 91년 공일오비의 ‘4210301’이란 노래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015B(사진)’ 혹은 ‘空一烏飛’라고도 쓰는 알쏭달쏭한 이름을 가진 이 팀은, 강남에 서울대 출신이라는 그들의 출신만큼이나 고급하고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 노래의 대부분은 사랑 노래였으나 2집의 이 곡 하나가 좀 튀었다.

우리말로 된 노래 부분은 슬픈 사랑에 대한 노래임이 분명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내레이션이 다소 독특했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하늘에서 떨어진 오염된 빗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제목이 ‘4210301’이라니.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진 팬들이 일곱자리 숫자라는 데에 착안하여 전화 다이얼을 돌려본 결과, 그 번호는 환경부 전화번호임이 밝혀졌다. 이 노래 때문에 환경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 되어 아예 전화번호를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당시는 대중가요 창작자도 팬들도 비교적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내레이션과 제목까지 연결시켜 보면 뭔가 환경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구태여 영어로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이때까지만 해도 대중가요가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까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어 ‘알아들으려면 알아듣고, 모르면 말고!’ 식이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대중가요 창작자들이 뭔가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을 노래에 실으려고 할 때에, 영어로 말해버리는 경향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공일오비는 다음 해에는 좀 더 과감히 우리말로 이런 내용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1. 상쾌한 아침엔 샴푸로 머리 감고 거울 앞에선 무스로 단장을 하고 / 하얀 연기를 뿜는 자가용 타고 친숙해진 소음 속에 나서지 / 깔끔한 식당에선 언제나 일회용 컵 일회용 젓가락만 쓰려 하고 / 문화인이란 음식을 남겨야 한다 생각하지 / (후렴) 우리가 내던진 많은 무관심과 이기심 속에 / 이제는 더 이상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잖아 /

2. 공장폐수 얘기에 의례히 화를 내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 더러워진 외출복은 합성세제로 세탁하지 / (후렴)” (공일오비의 ‘적(敵) 녹색인생’, 1992, 정석원 작사·작곡.)

이 노래는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아카펠라 곡이었다. 언플러그드니 아카펠라니 하는 새로운 말들이 들어오고 있던 때에, 이런 형식을 환경 문제의 내용과 연결시킨 발상이 참신했다. 92년은 이렇게 세상이 확실히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 해였다. 냉전이 무너져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산업사회 담론이 넘쳐나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국내에서는 이제 막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고, 이와 함께 뜨거운 민주화운동 열기도 식어가는 중이었다. 신문 인쇄를 콩기름으로 한다는 것을 내세운 모 신문사가 ‘내일은 늦으리’라는 제목의 문화행사를 열어 공일오비와 서태지와아이들, 넥스트, 푸른하늘 등 당대 내로라하는 신세대 대중음악인들을 불러 공연과 음반을 제작한 일은, 이제 환경 문제는 내놓고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괜찮은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나 이념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이슈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좀 더 참신한 음악을 듣기 원했던 진지한 대중음악 팬들은 이 음반에 실린 노래들을 주목했다.

공일오비의 노래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부러 가볍고 경쾌한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에 비해, 신해철이 이끄는 넥스트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에 접근했다.
“서기 1999년 9월 10일 전기의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 같다. 혹 생존자가 이 기록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무책임이 낳은 이 비참한 결과를 후세에 전하기 바란다. (중략) 북반구 전체 인구는 5% 이하로 감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기 중의 오존층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폭도들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떼를 지어 먹을 것을 약탈하고 다닌다. 그나마 그들도 곧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지만 하늘은 밤처럼 어둡다. 산성비와 일사량의 감소로 식물들은 전멸의 길을 걷고 있다. 몇 년째, 태어난 신생아들은 거의 모두가 기형아였다. 그나마 출산율조차 거의 제로를 향하고 있다. 대기의 온도는 계속 상승 중이다. 남극대륙은 물로 변하고 해안의 도시들은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추었다. 내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피부암은 전신을 덮고 있다. 나도 최후의 순간을 준비해야겠다. (하략)” (넥스트의 ‘1999’, 1992, 신해철 작사·작곡)

매우 어둡고 진지하지만 SF영화 같은 발상 덕분에 오히려 80년대 민중가요가 보여주었던 현실성을 묘하게 휘발시켜버려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 이때부터 9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인들은 환경 문제를 인류문명의 문제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다소 예민한 국내 정치경제적 문제로부터 약간 거리를 떼는 방식이었을 수 있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지금, ‘인류문명의 문제’였던 환경 문제는 점점 나의 생존 문제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대중음악인은 여기에 어떤 노래를 내놓을까 자못 궁금하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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