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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보고 느끼는 명품 서적 ‘애술린’ 한영아 아시아 총괄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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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명품 패션은 외모를 지향해왔다. 이젠 내면의 풍요로움을 추구할 때가 됐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명품 브랜드 ‘애술린(Assouline)’의 한영아(미국이름 Cindy Han·48) 부사장 말이다. 국내에선 애술린이 아직 생소한 브랜드다. 그렇지만 샤넬·루이뷔통·고야드·까르띠에·MCM과 같은 세계적 명품 브랜드 사이에선 이미 독보적 존재다. 이들이 브랜드 광고를 하거나 브랜드 북을 만들 때 꼭 찾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샤넬·루이뷔통 등이 옷·구두·가방·액세서리를 명품으로 만들었다면 애술린은 책을 명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애술린의 책은 읽기 위한 게 아니다.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기 위한’ 책이다. 글자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사진과 그래픽이 대부분이다. 표지부터가 하나의 디자인 명품이다. 한 질에 2만 달러(2400만원)짜리 책이 있는 이유다. 한 부사장은 “애술린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내놓을 한정판 책도 한 권에 2400만원이 넘을 것”이라며 “명품 책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부사장은 이달 중 애술린의 아시아총괄대표로 한국에 부임한다. 아시아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애술린이 아시아총괄본부를 서울에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파리·서울·홍콩 등을 오가며 미국·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예정이다. 아시아 시장 공략을 준비 중인 그를 뉴욕에서 만났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보고 느끼는 명품 서적이란 개념이 국내에선 아직 낯설다.

 “핸드백·귀걸이도 명품이 있는데 책은 왜 안 되느냐는 의문에서 탄생한 회사가 애술린이다. 책을 단순히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영감을 얻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패션 소품으로 보는 것이다. 모나코 왕실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상류 사회에선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명품 서적으로 서재를 꾸미는 게 패션 트렌드가 됐다. 루이뷔통 가방으로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듯 명품 책으로 내면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애술린은 어떤 책을 만드나.

 “가장 대표적인 게 『메무아르(Memoire·추억의 기록)』 시리즈다. 미니 북인데 샤넬·까르띠에·크리스찬디올과 같은 명품 브랜드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에서부터 전 세계 럭셔리 호텔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만 골라 모아놓은 『전망 좋은 방(Room with a View)』, 혹은 독특한 칵테일 만드는 법을 모아놓은 소품까지 패션·아트·건축·호텔·인물·여행·사진 등 1000여 종이 있다. 한정판 단행본도 다양하다. 크리스찬디올은 60주년 기념 브랜드 북을 우리에게 의뢰해 만들기도 했다.”

●세계적인 명품회사가 브랜드 북을 만들 때 애술린을 찾는 이유는.

 “명품 브랜드가 가진 독특한 유전자를 뽑아내는 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가 된 고야드의 진가를 12년 전 발굴해낸 것도 창업자 프로스페어 애술린이었다. 당시 애술린은 고야드와 합작으로 ‘메무아르 시리즈 북 트렁크’를 처음 선보였다. 샤넬·루이뷔통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애술린은 고야드를 선택했다. 트렁크와 책을 합쳐 2만 달러인데 지금 주문해도 3개월 후에나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공작이 됐다. 고야드의 미국 시장 진출도 애술린이 컨설팅했다. 명품 브랜드 마케팅도 우리의 전문 분야다.”

●이력이 다양하다. 언제부터 명품 브랜드 마케팅을 꿈꿨나.

 “고교 때부터 팬시한 걸 좋아했다. 남대문 새벽시장은 당시 나에게 뉴욕 같은 곳이었다. 틈만 나면 새벽에 남대문으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입김, 불야성을 이룬 휘황찬란한 조명, 그 아래 진열된 옷과 액세서리가 황홀했다. 언젠가 뉴욕의 패션가를 휘젓고 다니리라 마음먹은 건 그때다.”(그는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뒤 뉴욕 패션 명문 FIT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 후 계명대 교수가 된 배경은.

 “계명대 신일희 총장님이 패션산업에 조예가 깊었다. 패션학부를 창설하면서 초대 학부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3년 동안 있으면서 학과를 2개로 늘리고 다섯 분의 교수도 뽑았다. 당시 패션학부 학생을 다 데리고 대구에서 새벽 남대문시장으로 가 현장수업을 한 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학생들에게 남대문시장과 패션쇼장을 한꺼번에 보여줬더니 눈빛이 달라지더라. 패션은 살아있는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

애술린은 ‘보고 느끼는 명품 서적’을 만드는 회사다. 트렁크 브랜드인 고야드의 제품에 책을 담은 『메무아르(Memoire)』시리즈는 한 질(맨 위)이 2만 달러나 한다. 트렁크 외에도 악어가죽 케이스(가운데)에 책을 담아 전집을 내기도 한다. 크리스찬 디올의브랜드북(아래)도 애술린이 단골로 만든다.

●올해로 11년째를 맞은 서울 패션위크를 출범시킨 주역이기도 한데.

 “계명대를 떠나 ‘여자와닷컴’ 부사장을 할 때다. 서울시로부터 ‘서울 컬렉션’ 초대 총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파리·런던·뉴욕의 패션위크를 비교해봤더니 상업성을 추구하는 뉴욕 모델이 서울에 어울렸다. 뉴욕 패션위크 창설자이자 뉴욕 패션가의 전설 펀 맬리스 사무실을 수소문해 한번 만나자는 팩스를 무작정 보내기 시작했다. 열다섯 번 만에 답장이 왔다. 곧장 디자이너 지춘희 선생님을 찾아갔다. 무조건 최고로 보이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나를 처음 본 맬리스는 당황했다. 서울 컬렉션 총감독이라 나이 지긋한 사람으로 상상했는데 30대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럴 만했다. 그렇지만 그는 한눈에 내 차림새를 알아봤다. 그러곤 뉴욕 패션위크 행사장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프리패스를 선뜻 내줬다. 서울 패션위크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데도 그의 도움이 컸다. 지금도 그와는 멘토이자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엘 기획은 어떻게 했나.

 “서울 패션위크를 세 차례 총괄한 뒤 브랜드 마케팅회사 BMC를 창업했다. 그때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엘 론칭이었다. 명품관은 규모가 클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대신 고객이 한 장소에서 옷·구두·핸드백·액세서리를 한꺼번에 쇼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처음 도입했다. 고객의 취향을 파악해 스타일을 컨설팅해주는 브랜딩 스페셜리스트를 둔 것도 애비뉴엘이 최초다.”

●‘애비뉴엘’ 이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는데.

 “BMC 창업 때 투자를 해준 성주인터내셔널의 김성주 회장님이 2005년 독일 명품 브랜드 MCM을 인수했다. 처음엔 컨설팅만 해주다 아예 MCM의 글로벌 마케팅 책임자로 합류해 뉴욕에 갔다. 유럽 명품이긴 했지만 미국에서 철수했던 브랜드를 다시 론칭하는 건 쉽지 않았다. 5년 동안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15개 매장에서부터 플라자호텔과 삭스핍스 백화점 17개 매장까지 입점시켰다. 뉴욕시장에서 브랜드 마케팅의 모든 걸 직접 경험한 게 값진 자산이 됐다.”

●MCM에서 애술린으로 옮긴 이유는.

 “MCM이 뉴욕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걸 보고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MCM 브랜드 북을 만들면서 알게 된 애술린 창업자 프로스페어 회장은 브랜드 마케팅 전문가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마침 애술린은 아시아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콩에 두려던 아시아본부를 서울로 옮기는 조건으로 애술린에 합류했다.”

●앞으로 아시아시장 공략 계획은.

 “명품 서적이란 새 시장을 개척할 것이다. 아울러 명품 브랜드 마케팅과 컨설팅도 병행할 계획이다. 특히 한국엔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품질 좋은 제품이 많다. 그런데 브랜드 마케팅 경험이 부족해 명품 대접을 못 받고 있다. 애술린이 쌓아온 브랜드 마케팅 경험과 뉴욕·파리·런던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세계적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싶다.”

j 칵테일 >> 향기 나는 책, 진열 자체가 패션 …

애술린이 만든 샤넬 브랜드북(위)과 『전망 좋은 방(Room with a View)』.

16세 때부터 프랑스 파리 패션잡지에서 일했던 프로스페어 애술린(Prosper Assouline)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파리엔 수많은 명품 브랜드가 있는데 책은 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걸까.’ 모델이자 루이뷔통·로샤스·듀퐁 등 회사의 브랜드 마케팅을 돕던 아내와 함께 그는 1994년 자신의 성을 딴 ‘애술린’을 창업했다.

 애술린은 처음부터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패션 소품을 지향했다. 글 대신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그래픽 디자인을 강조했다. 진열 자체가 패션이 되도록 하기 위해 표지 디자인부터 명품으로 만들었다. 향기 나는 책이나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발찌로 장식한 독특한 디자인도 선보였다.

 애술린을 유명하게 만든 성공작은 『메무아르(Memoire·추억의 기록)』 시리즈다. 그동안 똑같은 크기로 명품 브랜드에서 패션·아트·건축·호텔·인물·여행·사진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룬 1000여 종을 내놓았다. 패션 디자이너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메무아르』 시리즈는 유럽 상류사회 패셔니스트의 필수 소장품이 됐다. 뉴욕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00년부터다. 뉴욕 사교계의 거물 브루크 오캄포의 친구 집과 상류사회의 모습을 담은 『밝고 젊은 것들(Bright Young Things)』이란 책 덕분이었다.

 명품 서적으론 이례적으로 8만 부가 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자, 애술린엔 유럽과 미국 명품 브랜드의 러브콜이 쇄도했다. 2005년엔 아예 본사를 뉴욕으로 옮겼다. 파리의 명품 브랜드가 뉴욕에 진출할 때 그의 컨설팅을 받지 않은 회사가 별로 없을 정도로 브랜드 마케팅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부턴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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