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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31번 … “잠깐 따끔하면 남을 도울 수 있는 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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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인 전종욱 군은 지난달 25일 31번째 헌혈을 했다. 서울시 구로구 ‘단골’ 헌혈카페의 간호사 누나와는 즐겁게 대화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됐다. [김진원 기자]

“오늘 모의고사를 쳤는데요, 왜 그렇게 많이 틀리는지. 휴~”

지난 2일 오후 6시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헌혈카페에서 전종욱(18·서울공고3) 군을 만났다. 시험을 망쳤다며 투정 부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평범한 학생은 아니다. 왕자다. ‘헌혈왕자’. 친구들이 놀리듯 부르는 그의 별명이다. 2009년 4월 3일 첫 헌혈을 한 이래 지금까지 2년 2개월 동안 31번 피를 뽑아 기증했다. 헌혈을 할 수 있는 만 16세부터 헌혈 종류에 따라 제한되는 주기를 고려하면 최대한 많이 한 셈이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등록돼 있는 고교생 헌혈자 가운데 최다 기록이다.

전 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헌혈이 하고 싶었단다. 형 종령(22·강남대2)씨가 헌혈하고 큰 일이라도 한 듯 자랑하는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해서 꾹 참아야 했다. 그러다 16세가 되자마자 헌혈을 하러 달려갔다. “생일이 지나고 겨우 나흘째 되던 날이었어요. 그렇게 기대하던 첫 헌혈이었는데, 생각보다 무섭더라고요. 따끔한 바늘이 들어오고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갈 땐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흐흐.”

그날은 별 생각 없이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후 우편으로 배달된 검사결과 통보지의 다음 헌혈 가능 날짜를 보자 ‘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지난달 25일 31번째 헌혈을 한 것이다. 이제 전 군은 헌혈카페의 간호사 누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남들은 10분씩 걸리는 ‘헌혈기록카드’를 1분이면 채운다. 헌혈대에 누워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편안한 휴식 시간일 뿐이다. 간호사 누나가 “그래도 주사바늘 꽂을 땐 약간 따끔할 걸”하자 전 군은 “하나도 안 아파요”라며 혀를 쏙 내민다. 그렇게 누워 TV를 보다 보면 순식간에 헌혈은 끝난다고 했다.

“친구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해요. 귀찮게 그걸 왜 하냐고 묻죠. 그럼 제가 ‘잠깐 따끔하고 1시간만 누워 있으면 쉽게 남을 도울 수 있는데 이걸 왜 안 하느냐’고 대꾸하죠. 그런 기분 좋은 일 하고도 기념품이랑 헌혈증서도 받을 수 있잖아요.”


전 군의 열렬한 ‘전도’에 넘어가 헌혈대에 누운 친구만 지금까지 10명이 넘는단다. 그는 “아픈 것이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헌혈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헌혈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머니도 제가 너무 자주 헌혈을 해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셔요. 그러실 때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열심히 설명하죠.”

전 군은 ‘헌혈유공장 은장’도 수상하게 됐다고 자랑했다. 대한적십자사에서는 30번 이상 헌혈한 사람에게는 은장을, 50번 이상은 금장을 수여한다. 그는 지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보여줬다. 총 12장의 헌혈증서다. 얼마 전 선생님 친구분이 아프다고 해서 6장을 드리는 등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때마다 나눠주고 남은 거라고 했다.

“6월 14일은 세계헌혈자의 날인데요, ABO혈액형을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한 칼 랜드스타이너 박사의 생일이래요”, “헌혈은 전혈헌혈과 성분헌혈이 있는데요….” ‘헌혈왕자’는 기자에게 한참 동안 강의를 한 후에야 헌혈카페의 문을 나섰다. “대학생이 돼서도 헌혈을 계속할거냐”고 묻자 그는 버럭 화를 낸다.

“당연하죠. 제가 무슨 봉사활동 시간이나 받으려고 헌혈하는 줄 아세요.”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기 좋았다.

글=박성민 행복동행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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