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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0) 저우언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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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6월, 베이징을 찾은 키신저. 1971년 7월 9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는 그 후에도 수십 차례 중·미 양국 사이를 오갔다. [김명호 제공]

1949년 이후 중·미 양국은 22년간 왕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담만 쌓은 것도 아니었다. 한국전 휴전 직후인 1955년부터 1970년까지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 대사급 회담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영문속기사 자격으로 여러 차례 회담에 참석한 전 포르투갈 대사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의 구술에 의하면 만날 때마다 양측의 입장 차가 너무 컸다고 한다. “15년간 136차례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를 본 사항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과학자 첸쉐싼(錢學森·전학삼)을 귀국시킨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래도 양국 지도자들은 판을 깨지 않았다. 앞으론 상대하지 않겠다거나, 상대방의 결점을 들이대는 등 어설픈 말이나 행동을 자제했다.

1970년 3월, 캄보디아에 정변이 발생했다. 시아누크가 축출됐다. 미국은 정변을 지지했다. 1개월 후 월남에 주둔하던 미군을 캄보디아로 이동시켰다. 중국은 바르샤바 회담 중지를 선언했다.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온갖 구호가 중국의 대도시에 난무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시아누크를 데리고 미국을 성토하는 백만인 대회에 참석했지만 발언은 하지 않았다. 중·미 관계 개선을 바라던 닉슨은 낙담했다. 키신저는 “평소에 하던 혁명구호의 반복일 뿐이다, 진일보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며 닉슨을 안심시켰다.

키신저가 복통을 호소하자 아히야 칸은 증세를 묻는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치료와 요양을 위해 산속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이동한다.” 키신저의 경호요원들은 산속으로 달려갔다. 몇 시간 후,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전화보고를 받은 키신저는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했다. 파키스탄 측에는 경호원들을 귀신도 모르게 억류시키라고 요청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베이징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키신저를 안내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파견할 4명의 외교관에게 행동지침을 설명했다. “도량이 넓고, 대범해라. 주눅 들지 말고, 거드름 피우지 마라. 온갖 예의를 다해라, 어지간한 결점은 용납된다. 억지로 권하지 마라.”
1971년 7월 8일 오전, 외교부 구미사(歐美司) 사장 장원진(章文晉·장문진, 후일의 주미대사), 예빈사(禮賓司) 부사장 왕하이롱(王海容·왕해용, 후일 외교부 부부장, 마오의 인척으로 별명이 통천인물이었다), 부처장 탕롱빈(唐龍彬·당용빈, 후일 스웨덴 대사), 영문통역 탕원성(唐聞生·당문생)은 간단한 차림으로 베이징 난웬(南苑) 비행장으로 향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출국이나 세관수속 따위는 물론 없었다. 키신저의 파키스탄 도착 일주일 전부터 중국에 와 있던 파키스탄 국영항공 707기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기내에 승무원도 없었다. 이슬라마바드까지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중국 대사관으로 직행했다. 정원이 좋았지만 창문도 못 열고 마당 산책도 못 했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많아 사진이라도 찍혔다 하는 날에는 낭패였다.

그날 밤, 아히야 칸의 사저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아히야 칸은 두 대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몫한 것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영광이 없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이튿날 새벽, 4명의 중국 외교관은 이슬라마바드 교외의 차크라라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일반 항공기로 새로 도장한 아히야 칸 대통령의 전용기였다. 얼마 후 2대의 승용차가 비행기 옆에 멈추는 것이 보였다. 탕롱빈은 얼떨결에 시계를 봤다. 4시20분이었다.
키 크고 삐쩍 마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파키스탄 외무장관 술탄 칸이었다. 이어서 키는 작지만 통통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숙이고 챙이 유난히 넓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이었지만 시꺼먼 색안경에 양복, 넥타이 구두 할 것 없이 검은색 일색이었다. 술탄 칸은 일행을 소개하고 자리를 떴다. 미국 측 인원은 키신저를 포함해 6명이었다. 그중 두 명은 보안요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키신저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깼다. “낸시 탕을 만나서 반갑다.” 중국 외교관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어안이 벙벙했다. 탕원성이 내 어렸을 때 이름이 낸시라고 하자 다들 웃었다. 탕은 뉴욕 태생이었다. 키신저가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했다. “미국 헌법에 의하면 낸시는 대통령 경선에 나가도 된다. 나는 독일 태생이라 틀렸다.” 이어서 파키스탄에서 꾀병 부린 얘기를 꺼냈다. 다들 깔깔대며 배꼽을 잡았다. 영어를 못하는 체하며 통역을 시켰던 장원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유창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다시 폭소가 터졌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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