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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보다 무서운 음모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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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끝날 때도 있지만, 가끔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거나 목숨을 잃는다.

많은 음모론의 경우, 그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워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과학 분야에선 객관적인 실험 과정을 거쳐 명백히 입증된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심심찮게 음모론의 대상에 오르는 경우가 적잖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천성 면역결핍증, 즉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이러스 감염 때문임을 알고 있다. 또한 감염 경로를 파악해 미리 차단하는 덕에 선진국에서는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가 급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몽테니에 박사와 갈로 박사에 의해 에이즈의 원인이 밝혀진 후에도 음모론은 줄기차게 제기됐다.

‘에이즈 음모론’은 88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피터 듀스버그 교수가 사이언스 지에 실은 글을 필두로 시작됐다. 저널리스트인 존 로릿슨은 ‘향정신성 물질인 아질산 아밀이 에이즈의 원인인데 미국 정부와 제약회사가 공모해 바이러스를 원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미 정부가 흑인들과 동성연애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바이러스’라는 음모론까지 퍼져나갔다.

안타까운 사실은 음모론의 피해자들이 음모론과 직접 연관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에이즈 음모론의 중심에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키 대통령은 자국 국민들의 에이즈 검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의 집권 당시 남아공에 에이즈 감염환자가 급증해 무려 3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근거 없이 시작된 음모론이 죄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표적 사례다.

요즘 가장 크게 부각되는 음모론 가운데 하나가 백신에 관한 것이다. 98년 영국 런던의대의 웨이크필드 박사팀은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를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에 게재했다. 이후 10년 넘는 논쟁 끝에 연구 결과가 조작됐음이 밝혀져 지난해 2월 그 논문은 철회됐다.

하지만 ‘웨이크필드 박사는 백신을 만드는 제약회사의 로비에 희생됐다’는 음모론이 재생산됐다. 백신이 안전하지 않은데, 제약회사와 미 식품의약국의 음모에 의해 접종이 계속된다는 불신 때문에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한때 미국에서 거의 사라졌던 홍역 환자가 몇 년 새 급증했다.

또 하나의 예는 소아마비(폴리오) 백신이다. 소아마비 백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백신 중 하나다. 88년까지만 해도 매년 35만 건 넘던 발병 건수가 세계보건기구(WHO)의 10여 년에 걸친 백신 접종 운동으로 2000년 이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자이자 의사인 이브라힘 다티 아메드는 나이지리아 정부의 이슬람법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소아마비 백신 접종에 미국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아마비 백신에 불임약을 섞어 접종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파로 200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소아마비 발병의 절반가량이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났고, 아프리카 인접 국가들의 소아마비 발병률까지 높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다시 백신 접종을 시작한 이후 소아마비 발병률은 다시 낮아졌지만 근거 없는 음모론 때문에 수만 명이 허무하게 희생된 다음이었다.

때로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제기되는 음모론은 우리 사회의 신뢰를 깨뜨린다.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근거 없는 음모론이야말로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질병이 아닐 수 없다.

편도훈 교수
美 콜로라도 의대(미생물학)

편도훈 경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바이러스학과 종양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냈다. 미국 암연구 학회와 바이러스학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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