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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과학이 파멸을 부른다니요, 걱정도 팔자십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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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국립공원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케빈 켈리. 21세기 테크놀로지의 전도사로 통하는 그는 한때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한 원초적 자연주의자였다. 신간 기술의 충격은 첨단 디지털 기술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 역작이다. [케빈 켈리 제공]

기술의 충격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민음사
490쪽, 2만5000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뷰티풀!”이 아닐까? 증명하지 못했던 난제를 푼 천재 수학자의 활약 앞에 동료들은 “뷰티풀!”이라며 찬탄한다는데, 『기술의 충격』이야말로 그렇다.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담은 과학철학서임에도 미학적 감탄부터 나온다. 심호흡한 뒤 한 줄씩 음미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당대에 출현한 고전 앞에 갖춰야 할 예의인데, 그 경우 “내가 본 테크놀로지 서적 가운데 최고”라는 해외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디지털 전도사로 통하는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이 책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정확하게는 과학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우는 논란의 종결자다. 그렇다면 옛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잠시 내려놓자. 기술의 진화 앞에 경탄하는 우리는 환경재앙, 생명존엄에 대한 우려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하이데거다. 이를 부정하며 등장한 21세기 과학철학자 켈리는 과학 마인드에 충실하고 내용도 실로 산뜻하다.

유나버머(左), 케빈 켈리(右)

 흥미로운 게 괴짜 폭탄 테러범 유나버머와 정면 승부하는 대목이다. 잘 알려졌듯 유너버머는 1970년대 미국 시민 26명을 살상했고, 과학기술을 사탄으로 규정한 선언문을 워싱턴포스트 등에 실었던 인물이다. 그의 신조에 암묵적 동조자가 적지 않지만, 그는 『월든』의 저자 데이비드 소로처럼 몬타나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다.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25년, 수십 발 폭탄을 제조하며 이를 갈았다. 기술문명에 취한, 병든 세상을 향해 경고하려 했다.

 “유나버머 논리는 일부 맞지만, 나머진 결정적으로 틀렸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유나버머만큼 흥미로운 게 케빈 켈리이다. 그는 과학전문지 ‘와이어드’의 공동 설립자다. 유나버머처럼 야생의 삶을 즐기는 자연애호가다. TV도 없이 도시에서 살지만, 주말이면 코요테가 어슬렁거리는 산이나 캘리포니아 데스 밸리를 탐사한다. 그러면서도 뉴욕타임스로부터 위대한 사상가란 칭호를 얻었으니, 수수께끼 인물이 맞다.

 왕년에 히피였던 그가 어떻게 기술옹호 쪽으로 ‘개종’ 했을까? 그는 중앙일보 e-메일 인터뷰에서 “인터넷이 나를 ‘회개’시켰다”고 했다. 책의 중심 테마도 그렇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착각했다. 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슈퍼컴퓨터나 개인용 로봇부터 시작할 것으로 예견했지만, “인공지능은 웹(web)이라고 하는 10억 개 중앙연산장치(CPU)로 이뤄진 초유기체 속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403쪽)

 켈리가 말하는 기술이란 시커먼 공작기계, 매연을 내뿜는 증기기관, 혹은 수상한 화학물질만이 아니다. 현금흐름을 포착하는 복식회계, 인류 삶을 바꾼 시계, 그리고 탈(脫)물질적 흐름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첨단기술까지 넓은 의미의 기술이다. 빅뱅 이후 우주 탄생으로 올라가 보면 기술이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생명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생명이 등장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수십 억 생명 진화의 결정적 연결고리가 기술이다.

 우리가 자연·생명에 속절없이 끌리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성향이 있듯이 기술에 친화력을 느끼는 테크노필리아(techophilia)도 그 때문이다. 기술이란 인간 몸의 확장이자, 마음(정보처리 능력)의 탄생과 연결돼 있다. 생명·인간·기술이 벌이는 공(共)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그건 ‘우주 마음’ ‘기계마음’로 암시되는데, 이 대목은 과학·영성 사이를 탐구했던 프랑스철학자 테야르 샤르댕의 우주론을 연상시킨다. 그럼 책이 우리에게 주는 암시가 있을까.

 당연, 있다. 유전공학(geno)·로보공학(robo)·정보공학(info)·나노기술(nano) 즉 ‘GRIN’으로 상징되는 첨단기술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다. 그런 기술은 인간복제로 이어지는 깡패 기술이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우려는 유나버머 식의 넌센스다. “유나버머는 기술이 자유를 빼앗는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정반대임을 안다”는 게 저자의 단호한 말이다. 그럼에도 반기술론자·반문명론자들은 현대인이 대기업의 음모에 눈멀었다고 거듭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항생제도, 자동차도 없이 행복한 야생상태라는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야 한다고? 반기술론자 중 실제로 그렇게 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게 켈리의 지적이다. 그러나저러나 걱정이다. 저자에게 e-메일로 향후 저술계획을 묻자 젊은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앞으론 e-북으로 쓸 것이라는데, 부디 종이책도 함께 펴내주길 바란다. 그래야 지적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좀 더 멀리 볼 수 있을 게 아닌가.

조우석(문화평론가)

케빈 켈리의 말말말

“기술은 ‘님’이자 ‘우리’다. 기술을 통째로 거부할 때, 그것은 자기 증오가 된다.”(228쪽, 인간에게 기술은 제2의 자아라는 것을 강조하며)

“우리는 청개구리보다 휴대폰에서 신(神)을 더 잘 볼 수 있다.”(435쪽, 지구생명과 기술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뜻)

“웹(web)은 야생의 세계다. 웹은 생명 같은 낌새를 풍긴다.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나를 더 크게 만든다.”(394쪽, 웹이 인공지능의 한 형태임을 지적하며)

“악덕이 없는 기술은 없으며, 중립적인 기술도 없다.”(300쪽, 기술은 인류가 통제하기 나름이라며)

“결국 (생명·인간·기술이 벌이는 진화는) 더 많은 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무한게임이다. 그것이 기술이 원하는 것이다.”(438쪽, 원서 제목이 ‘기술이 원하는 것(What Technology Want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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