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영어 시험의 실용과 평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브라질 작가 파울루 코엘류는 『연금술사』를 비롯한 작품 29권을 전 세계에 1억5000만 부나 팔았다. 코엘류는 포르투갈어로 작품 활동을 하지만 “영어로 출간되지 않는 책은 무의미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영어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말이다.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더라도 국제어, 과학의 언어로서 영어의 패권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영어를 잘하는 게 개인의 경쟁력이자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영어의 실용성은 확고하다. 영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교육의 기회나 소득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영어는 실용뿐만 아니라 평등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ational English Ability Test) 개발이 마무리 단계다. 정부 구상에 따르면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은 영어의 실용·평등 차원을 모두 만족시킬 시험이다. 내년에 처음 시행되는 이 시험은 ‘문제 풀이’ 능력이 아니라 ‘실용영어’ 능력을 테스트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적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구비’하도록 유도하는 게 시험의 목표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실시를 통해 영어 공교육을 강화하고 영어 교육 격차를 해소한다는 정책 비전도 담겨 있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은 공교육을 통해 영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과 대학 입학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시험에서 읽고·듣고·말하고·쓰는 영어를 모두 측정하기 때문이다. 이론으로 보나 실천으로 보나 이러한 교육·학습·평가 방향이 올바르다. 학자들은 읽고·듣고·말하고·쓰기를 한꺼번에 공부해야 영어 학습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말한다. 미국 대학생들을 보면 한국어·일본어·중국어를 처음엔 영문 알파벳으로 배우지만 금세 초급을 넘어 중급·고급 수준에 도달한다. 읽기·듣기·말하기·쓰기를 동시에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도 이미 읽기·듣기·말하기·쓰기를 한꺼번에 배우는 멀티미디어 영어 교육을 받고 있다. 이 학생들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역사에서 영어 고민이 없는 최초의 고등학생·대학생이 될 수 있다. 기업이나 대학에서도 영어의 네 영역을 모두 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이 상징하고 대표하는 실용·평등주의적 영어 정책은 정부나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돼야 한다.

 이 시험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외국어(영어) 영역을 대체할 것인지는 2012년 말 결정된다. 수능을 대체한다는 결론이 나면 지금 중학교 2학년 학생은 2016년 이 시험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 대학 신입생들은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것도 잘할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대학입시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 대학입시에 한자가 나오면 입학생들이 한자를 잘하고 논술이 나오면 논술을 잘한다.

 2016년 대입생들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하기·쓰기를 잘할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는 사회적인 비용이다. 영어 정책의 문제는 어쩌면 복지 문제와 닮은꼴이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우리나라가 궁극적으로 복지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의견 차이는 복지 정책 구현의 범위와 속도에 대한 것 아닌가. 복지 정책을 둘러싼 포퓰리즘 논란이 있는 것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적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구비한다’는 목표도 새로운 포퓰리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복지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정부가 영어 공교육에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의 규모다.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 읽기·듣기·말하기·쓰기를 한꺼번에 구현할 교육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정부가 충분한 지출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부담은 학부모들이 떠맡아야 한다. 영어 말하기·쓰기 능력을 사교육에 의존할 수 없다. 부모의 소득이 자녀들의 영어 실력을 결정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정부가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을 어떻게 운영할지 주목된다. 실용과 평등 모두 달성하기를 기대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