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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 담합 6시간 공방…4348억원 놓고 업체끼리 ‘죄수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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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5일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정유사 담합 사건을 안건으로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8명의 위원이 참석했다. 심판정 내에선 원칙적으로 촬영이나 녹화가 금지돼 있지만 공정위는 이날 개정 직전 10분간 언론사의 촬영을 허용했다. [변선구 기자]


26일 공정거래위원회는 4대 정유사에 과징금 4348억원을 부과했다. 이들이 이른바 ‘주유소 나눠먹기’ 담합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매긴 과징금 액수는 2009년 6개 액화천연가스(LPG) 업체의 가격 담합에 부과한 6689억원에 이어 공정위 역사상 역대 두 번째 규모다. 업체별로는 ▶SK(SK㈜·SK이노베이션·SK에너지) 1379억7500만원 ▶GS칼텍스 1772억4600만원 ▶현대오일뱅크 744억1700만원 ▶에쓰오일 452억4900만원 등이다.

 전날 공정위의 전원회의에서 4대 정유사와 공정위 심사관 간 6시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을 벌인 결과다. 전원회의는 재판과 같이 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그간 ‘방청석 자리 부족’과 ‘사업자의 영업비밀 보호’ 등을 이유로 민감한 사안은 대부분 방청이 제한됐다. 이날 전원회의는 민감한 사안으론 언론에 전면 공개된 사실상 첫 케이스다. 이날 전투는 전초전 성격이다. 일부 정유사는 이미 법적 대응을 선언하는 등 반격을 벼르고 있다. 현대오일뱅크 측은 이날 “담합한 사실이 없으며, 사회 정의 실현 차원에서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징금 4348억원을 건 ‘경제검찰’의 칼과 4대 정유사의 방패 간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전원회의 사실상 첫 공개 … 공정위 6층 심판정에선 무슨 일이

“2011-1호 안건, 석유제품 제조·판매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건을 상정하겠습니다.”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6층 심판정.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안건 상정을 선언하면서 나란히 앉은 4대 정유사 관계자들과 공정위 심사관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판정에는 국내 굴지의 로펌들이 총출동했다. SK는 세종, GS칼텍스는 율촌, 현대오일뱅크는 태평양, 에쓰오일은 김&장이 각각 대리해 2~3명씩의 변호사들을 대동했다. 공정위와 업계는 한 치의 양보 없는 논리 싸움을 벌였다. 정유사들끼리도 ‘4사4색’, 이해에 따라 서로 견제하기도 했다.

  ◆죄수의 딜레마=“원래 (담합) 합의문은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사가 합의 내용을 각 지역에 전화로 알리는 걸 옆에서 들었습니다.”

 GS칼텍스 한 중견 간부의 답변에 심판정이 술렁였다. 타 정유사 관계자들의 눈에는 원망과 탄식이, 심사관의 얼굴에는 득의만만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유소 나눠먹기, 이른바 ‘원적(原籍) 관리’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업체 관계자가 직접 진술한 것이다.

 “합의가 있었던 건 2000년 3월, 여의도 일식집에서였다”고 그는 밝혔다. 합의문 자체는 증거로 제시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증거로 제시된 건 GS칼텍스 담당자가 그날의 합의를 인정한 진술서였다. 이날 참고인으로 나온 이는 진술자와 함게 일했던 직원이었다.

 타 정유사들은 일제히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현대오일뱅크 측은 “임원급도 아닌 일개 직원들이 그런 합의를 했다는 진술을 믿기 어려운 데다 치열한 경쟁상황상 그런 합의는 나오기 어렵다”면서 “이는 공정위 직원이 한 달만 주유소에 근무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GS칼텍스가 공정위 조사에 적극 협조하는 대신 과징금을 감면받는 길을 택한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GS칼텍스 측은 공정위의 심사의견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래프와 숫자의 전쟁=“합의가 있었던 2000년 이후 정유사들의 주유소 점유율의 변화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사관인 신영선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은 현장에서 두 개의 그래프를 모니터에 띄웠다(그림 참조). ‘원적 관리 합의’를 전후한 정유사별 주유소 점유율 변화 추이를 나타낸 것이었다.

 공정위의 심판정에선 숫자와 그래프가 자주 등장한다. 담합한 사실뿐 아니라 담합으로 실제 경쟁이 제한됐는지, 그에 따라 소비자의 이익이 얼마나 침해됐는지가 쟁점이 되고 이를 ‘경제분석’을 통해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종 수치와 그래프가 등장하고 전문가들끼리 치열한 ‘이론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신 국장이 제시한 그래프에 대해 정유사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달았다. 전국적으로 주유소가 급증하던 1990년대와 달리 2000년을 전후해선 각사가 어느 정도 주유소망을 갖춘 상태라 점유율이 안정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또 과점상태에선 일반적으로 전면전을 피하는데 이때 나타나는 게 균형이란 설명이다. 현대오일뱅크 측 변호사는 “그래프를 보면 2000년대 들어 우리 측의 점유율은 눈에 띄게 떨어졌는데, 시장 3위 업체가 점유율에서 크게 손해보면서 선두업체와 담합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개별 연도나 구간으로 따지면 공정위의 주장과는 달리 치열한 경쟁 상황이 관찰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SK 측 변호사는 “적어도 2004~2007년에는 서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유치전이 벌어졌고, 설령 담합이 있었다고 해도 이때 깨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진납세 100원의 효과는=SK 측 대표로 참여한 한 임원은 최후진술에서 “최근 특별한 가격인하를 한 노력을 위원회가 감안해 달라”고 말했다.

 4월 이후 휘발유와 경유 공급가를 100원식 내린 정유사들의 ‘희생’을 제재수위를 결정할 때 반영해 달라는 의미다. 업체 측 관계자들의 말 속에선 ‘자진납세’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너무 몰아치는 것 아니냐는 원망의 뉘앙스도 묻어 나왔다. 현대오일뱅크 측은 “기름값 인하 분은 우리 회사 전년 세전 이익의 40%”라면서 “정부에 협력하기 위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는데 이렇게 조사 대상이 돼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유4사’라는 상징성 때문에 억울하게 제재대상에 포함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최후 진술에서 “선두업체와는 달리 우리는 ‘정유업계의 이단아’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하게 경쟁을 해왔는데 (제재 대상에 포함시킨 건) 네 회사 중 하나를 빼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실제 기름 값 인하의 효과가 과징금 산정에 반영됐는지는 최종 의결서가 나와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위원회가 결정한 과징금 규모는 당초 심사관의 조치의견에서 제시한 과징금(6125억원)에선 크게 줄어든 액수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름 값 인하 부분보다는 직접적인 가격 담합이 아니란 점을 고려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글=조민근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전원회의=공정거래위원회는 공정거래법 등 위반사건에 대해 1심 기능을 수행하는 준사법적 기관이다. 주요 사건의 심판은 공정위원장, 부위원장과 1급 상임위원 3명, 비상임위원 4명 등 위원 전원(9명)으로 구성된 전원회의에서 이뤄진다. 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지만 통상 만장일치로 합의를 유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전원회의가 ‘판사’ 역할을 한다면 보통 공정위 국장이 조사를 바탕으로 ‘검사(심사관)’ 역할을 한다. 법을 위반한 사업자는 ‘피고(피심인)’가 된다. 결국 공정위가 판사와 검사 역할을 다 하는 셈이다.

◆원적(原籍) 관리=업계 용어로 주유소가 상표(폴 사인)를 바꿀 때 종전 상표 정유사를 ‘원적’이라고 부른다. 가령 갑 주유소가 A정유사 상표로 영업을 시작했다면 A정유사는 갑 주유소의 원적사가 된다. 정유사들이 자기 계열 주유소나 과거 자기 계열 주유소였던 무폴 주유소에 대해 기득권을 서로 인정해 경쟁사의 동의 없이 타사 원적 주유소를 임의로 유치하지 않는 영업 관행을 ‘원적 관리’라고 한다. A정유사 상표로 영업하던 갑 주유소가 B정유사로 상표를 변경하려고 해도 A사의 동의가 없으면 B사는 갑 주유소와의 거래를 거절해야 한다.

◆리니언시(leniency)=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 과징금 감면이라는 당근을 줘서 담합행위자의 자수를 유도하는 제도다. 담합 사실을 처음 신고한 업체에는 과징금 100%를 면제해 주고, 2순위 신고자에게는 50%를 면제해 준다. 당사자가 입을 닫으면 담합 적발이 어렵기 때문에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일반화됐다. 리니언시의 작동원리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로 설명된다. 두 공범자가 서로 협력해 범죄사실을 숨기면 증거 불충분으로 형량이 낮아지는 ‘최선’의 결과를 누릴 수 있지만 상대방이 먼저 자백할까 두려워 둘 다 죄를 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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