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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 주소 연기 … “3색 신호등 학습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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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주상복합건물인 서울 영등포구 대림2동 신대림자이의 현재 주소는 대림2동 1121(101, 102동), 1122번지(201동, 202동)다. 번지가 붙어 있어 같은 아파트 단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새 도로명 주소는 ‘시흥대로 173길 13’(101, 102동)과 ‘도림천로 21길 467’(201, 202동)이다. 주소만 보면 같은 아파트라고 생각할 수 없다.

 김문배 영등포구청 지적과장은 “건물의 주 출입구 쪽에 있는 길 이름을 따온다는 원칙을 적용했다”고 말했다. 101, 102동은 시흥길 쪽으로, 201, 202동은 도림천로에 출입구가 있다. 202동 주민 장광덕(67)씨는 “우리는 관리사무소도 하나고, 관리비도 같이 내는데 새 주소를 보면 같은 아파트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17일 주민대표회의를 열고 주소를 하나로 통일해 달라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행정안전부는 1997년부터 도로명 새 주소를 도입하기 위해 그동안 3692억원을 썼다. 7월 말 새 주소를 최종 확정하고 내년 1월부터는 새 도로명 주소만 사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국민과 소통하지 못했다. 아직도 새 주소가 생소하고, 혼란스럽다. 결국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새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을 내년 1월에서 2년 연장하기로 했다. <중앙일보>5월 18일자 20면>

 정정목 청주대(행정학) 교수는 “아무리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해도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만 일으킨다”며 “최근 경찰이 철회한 ‘3색 신호등’처럼 일방통행식으로 사업을 벌인 게 문제”라고 말했다. 고계현 경실련 사무총장은 “이번 연기의 배경에는 3색 신호등 학습효과가 작용한 듯싶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지금 상태로는 혼란이 커질 우려가 있어 보완하는 시간을 더 갖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의 주소를 바꾸는 이 사업은 국민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주민등록증·면허증 등에 기입하는 주소를 모두 바꿔야 한다. 금융회사나 통신사들은 우편을 받는 고객들의 주소도 모두 변경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안이하게 대처했다. 도로표지판 교체 등 하드웨어를 정비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정작 새 주소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실패했다. 실제 지난 3월 26일부터 2600만 명에게 새 주소를 통지하자 민원이 속출했다. 한 단지 내 두 주소를 받았거나 생소한 길 이름을 주소로 사용해야 하는 주민들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X) 같은 주소”라며 반발했다. 행안부에서 모니터링을 해도 부정적인 의견이 워낙 많았다.

세금 낭비도 우려된다. 앞으로 2년간 홍보를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수백억원의 예산을 더 들여야 한다. 박원주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옛 주소와 새 주소의 병행 사용기간을 2년 연장한 만큼 이 기간에 새 주소의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불만이 접수된 주소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선·양원보 기자

◆새 주소 왜 도입하나=기존 주소는 토지 지번을 토대로 만들었다. 개발을 하면서 분할과 합병으로 인해 배열이 불규칙해지면서 지번만으론 위치를 찾기 어렵게 됐다. 도로명 주소는 도로마다 특성 있는 이름을 붙이고 건물엔 규칙적으로 번호를 매겨 집을 찾기 쉽다. 물류 비용을 줄여 국가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는 게 행안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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