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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부르는 굿판 - '일식'

중앙일보

입력

해가 사라진다. 까맣게 타들어가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괴현상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둠만이 깔린 세상. 한국전력의 전기수리공들이 등장한다. 이어서 무당, 맹인소녀, 시인 갑남, 화랭이 등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해가 사라진 것에 대해 궁금해하고 시인은 이를 '일식현상'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때 환상적인 정경이 펼쳐진다. 어둠사이로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다름아닌 '백년묵은 귀신들'이 그것. 귀신을 믿지 않던 전기수리공들도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급기야 김반장은 무사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그러나 곧 정신을 되찾는다.

환영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명성황후의 궁녀들이 일본 무사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한 궁녀가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오며 무사에게 뒤쫓긴다. 전기수리공들과 남자들이 그녀를 구해낸다.

사람들과 함께 남겨진 궁녀. 무당과 수리공들이 그녀의 정체를 캐묻자 궁녀는 도망가버리고 시인은 그녀의 뒤에 대고 안심하라고 외친다. 귀신들을 두 눈으로 본 무당, 원혼(怨魂)이 있는 것이라 짐작하고 굿판을 벌이기로 한다.

굿판이 요란하게 펼쳐지고 귀신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보다못한 김반장이 "귀신들이여,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해가 사라지자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 아무도 없다"고 타이르자 되레 즐거워하는 귀신들. 혀를 차며 바라만보던 수리공들도 급기야는 춤판에 가담한다.

다시 정신을 되찾은 전기수리공들과 무당 일당들. "제발 해 좀 건져달라"고 애원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신들은 자기들은 해를 띄울 수 없으니 인간들이 알아서 하라면서 떠나려한다. 매달리는 인간들에게 한마디 덧붙이며 : "마음에 평화는 주겠노라" 고.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 무당은 그때까지 숨어 있던 궁녀를 향해 호통친다.

궁녀와 시인을 남겨놓고 사람들이 사라진다. 명성황후의 얘기를 꺼내면서 권위에 짖눌려 생명을 경시한 그네들의 의식을 다그치는 시인에게 궁녀는 자신은 살아 있다, 고만 대답할 뿐이다. 시인은 자신이 환상을 보았음을 확신하고 감격해한다.

또다시 환영이 보인다. 김흥집이 행차도중 살해당하고 녹두장군이 형장으로 향해 장렬하게 행진한다. 종로사거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부릅뜬 눈으로 볼 수 있게 두 눈을 정문에 걸어달라는 말만 남긴 채. 시인은 갑자기 깨닫게 된다. "해는 노래로 띄우는 것이다"

신라시대, 2개의 해를 '도솔가'로 진정시켰던 월명사를 불러낸다. 월명사는 도움이 못 되고 횡수를 늘어놓다 가버린다. 시인과 화랭이 총각은 자신들이 그 노래를 짓겠노라 뜻을 보인다.

이번에는 아관파천 중인 고종이 나타난다. 궁녀들이 모는 마차에 상궁의 호위를 받으며. 숨어있던 궁녀는 흐느끼며 나타나고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자 갓옷을 쓴 고종이 나온다. 퇴락하는 국가의 짐을 얹고 사는 자신의 비애를 읊는 고종. 궁녀 유실은 슬픔을 노래한다.

궁녀 유실이 노래하는 궁녀였음을 알고 시인과 화랭이는 뜻을 확고히 한다. 무당은 다시 한 번 굿을 준비한다. 구한말 열강들의 환영이 잠시 보인 뒤 시인은 궁녀에게 노래를 바친다.

궁녀 유실은 시인과 화랭이의 노래를 받아들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굿판이 벌어지고 검게 탄 명성황후가 나타난다. 명성황후는 액을 벗고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는다. 원혼이 풀린 것이다. 사람들은 떠오를 해를 기다리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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