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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경쟁’을 ‘생존 경쟁’으로 착각하면 불행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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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호 29면

러셀을 움직인 것은 열정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다.” [AP=본사특약]

버트런드 러셀은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이다. 수학자·논리학자·역사가·사회비평가인 러셀은 특히 20세기 영미권에서 주류를 형성한 분석철학의 아버지다. 그의 학문은 인식론·형이상학·과학철학뿐만 아니라 교육철학·도덕론에도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러셀은 ‘영국의 볼테르’로 불렸다. 1970년 그가 97세로 사망하자 부고 기사는 ‘영국의 볼테르’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이 별명을 좋아했다. 1958년에는 ‘볼테르가 내게 미친 영향’이라는 글을 프랑스어로 발표하기도 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21>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비밀일기 쓰는 조숙한 10대
러셀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자유주의 휘그당을 세운 가문이다.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빅토리아 시대에 총리를 지냈다. 그의 대부(代父)는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하지만 러셀의 인생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3세에 고아가 됐다. 할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에게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받는 가운데 러셀은 자신이 무신론자가 된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는 10대일 때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비밀일기를 썼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재주도 터득해야 했다.

『행복의 정복』의 영문판 표지.

그를 둘러싼 환경에서는 극단이 공존했다. 러셀의 집안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종교적으로는 보수주의적이었다. 외가 쪽 삼촌 중에는 로마가톨릭 주교, 메카에 순례를 다녀온 무슬림, 무신론자가 있었다. 러셀은 무신론자가 됐다. 조숙했던 그는 16세 때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의 종교는 온전히 이것이다. 모든 의무를 다하고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말라.”

러셀의 말년에 그가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그는 16세 이후 변하지 않았다. 러셀은 평생 “모든 형태의 종교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믿었다. 1927년에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 교회 제도나 신자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믿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의 가정사도 수차례의 결혼·이혼·혼외정사로 얼룩졌다. 그 결과 그는 ‘무신론자는 악하다’는 명제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의 타깃이 됐다.

사회운동가로서 러셀의 행보도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장 현명한 영국의 바보(England’s wisest fool)’라고 불렸다. 영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흥분하기도 하고, 민족주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류 진보를 위해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그는 진보나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징집 반대운동을 하다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에서 해고됐다. 1918년에는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50년대는 반핵운동, 60년대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했다. 61년에는 89세의 나이에 데모를 하다 7일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러셀은 여성 참정권, 실험결혼, 성교육을 주장했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데 쓰였다.

생계 위해 대중서 집필
러셀은 전문 분야가 아닌 영역에서 대중적인 글을 많이 남겼다. 사람들은 천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기에 충분히 시장 수요가 있었다. 1914년 이후에는 정치 이론, 사회 정책, 역사, 대중과학, 결혼, 섹스, 교육에 대한 책과 기고문을 썼다. 그는 150권의 책과 2500개의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30시간에 한 번꼴로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남아 있는 편지가 5만 개다. 강연과 글쓰기는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1945년 베스트셀러가 된 『서양철학사』의 출간으로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평생 누리게 됐다. 그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글을 빨리 쓸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이 점에서 토머스 페인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마지막 빅토리아 시대 인물의 사망’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는 TV에도 자주 나와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20세기형 공공지식인이기도 했다.

러셀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꽤 된다. 그가 쓴 대중서는 지식 부족, 경험 부족이 드러난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평생 일반인을 계몽하는 작업에 충실했으나 “다윈은 보통 사람 3000만 명의 가치가 있다”는 발언으로 엘리트주의자라는 공격도 받았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 그를 ‘열정적인 이기주의자’라고 표현했다. 런던 정경대 설립자인 비어트리스 웨브는 러셀이 ‘악마적인 기지를 지닌 타락한 천사’라며 “그가 행복하게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행복하지 못한 러셀이 지은 『행복의 정복』은 읽을 가치가 있을까. 『행복의 정복』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남녀차별적·인종차별적인 대목도 많다. 『행복의 정복』에 대해 러셀의 제자이자 동료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토할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복의 정복』은 충분히 검증받은 책이다. 출간 당시부터 고상한 지식인들은 외면했지만 일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의사들의 지지도 받았다.

『행복의 정복』은 러셀의 체험담이기도 했다. 독자들이 보기에도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해졌다는 러셀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러셀의 체험담은 이렇다.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게 뭔지 발견하고 노력하자 점차로 그중 많은 것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자 행복이 증진됐다는 것이다. 공포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맞서면 된다는 경험을 말하기도 했다.

비교 안 하면 시기심 극복 돼
『행복의 정복』은 ‘평이한 영어(Plain English)’ 혁명 전에 저술돼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구성과 내용은 단순하다. 러셀의 행복론은 상식적·이성적이었다. 대상은 평범한 사람들로, 뚜렷한 외부적 원인 없이 일상적인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설정했다. 그들은 심각한 불행요소가 없기에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하면 다수가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러셀은 낙관했다. 노력하면 잘못된 세계관, 잘못된 윤리관, 잘못된 생활습관을 고쳐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은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러셀은 좋은 사고를 하는 습관으로 걱정을 극복했다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러셀의 해법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생각나게 한다.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고 행복의 원인을 수용해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다. 러셀이 거론한 불행의 원인은 경쟁, 시기,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와 같은 것들이다. 그중 시기는 비교를 안 하면 극복된다고 역설했다.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은 나폴레옹을 시기하게 되는데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카이사르는 알렉산더 대왕을, 알렉산더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헤라클레스를 시기했다는 것이다. 죄의식에 대한 해결책은 무신론자인 러셀의 선호가 드러난다. 그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전통적인 종교의 도덕코드는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의 원인으로는 열정, 애정, 가족, 노력과 포기를 들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해 사심 없는 관심을 갖고 사람들을 관찰해 그들의 개성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행복의 원인이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들을 지배하겠다든가 그들의 우상 대상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을 추구할 때 사람들이 흔히 하기 쉬운 오해를 경계했다. 우선 성공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의 한 요소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생존 경쟁’ 때문에 불행하다는 사람이 많으나 그들은 사실 생존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했다. 또한 불행의 주요 원인인 따분함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흥분이라고 주장했다. 러셀은 따분함에 대해 특히 ‘가혹’했는데 러셀은 인류가 범하는 죄악의 반은 따분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행복의 정복』은 불행의 사회·정치·경제적 원인을 강조한 데서 시대를 앞서간 측면이 있다. 특히 당시 영국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불행을 초래한다는 지적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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