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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⑮ 새롭게 선보인 금융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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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비상근이사와 상근이사가 함께 경영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던 한국개발금융의 초창기 이사회 모습. 회의를 주관하는 홍재선 당시 회장(가운데)과 김진형 사장(그 오른쪽).


민간이 소유하고 민간이 운영하는 금융회사가 국내에서 처음 탄생했다. 1967년 4월 20일, 3년여의 준비 끝에 한국개발금융이 정식 출범한 것이다.

 한국개발금융은 지분의 40%를 일반에 공모했다. 삼성·금성방직·경방·대한제분 등 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는 물론 비회원사 기업들도 민간 금융회사의 주주가 된다고 하자 적극 환영했다. 불과 열흘 만에 청약을 마쳤다. 납입금은 4억7500만원으로 5대 시중은행의 납입자본금 5억원과 비슷했다.

 새로 지은 조흥은행 본점 건물 12층의 절반을 빌려 한국개발금융 사무실을 꾸렸다. 초대 사장에는 한국개발금융 설립을 준비해 온 김진형 전 한국은행 총재가 선임됐다.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고 나도 흔쾌히 응했다.

 개발금융은 기업 전담 은행이었다. 기업이 새로 하는 사업을 심사해 시설자금을 대출해 주는 역할을 했다. 자금은 대부분 세계은행에서 왔다. 대출 심사도 세계은행 기준에 따라 까다롭게 이뤄졌다.

 개발금융에서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은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회계사가 감사한 재무제표를 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감사 비용이 엄두가 나지 않아 제대로 재무제표를 감사받는 회사가 별로 없었다. 또 그렇게 허술해도 일반 은행이 대출을 해줬다. 하지만 개발금융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기업들이 재무제표에 대해 회계감사를 받아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LG화학이 제1호로 10만 달러를 대출받았다. 그때만 해도 10만 달러의 외자를 유치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개발금융은 직장으로서도 인기가 있었다. 직원 수는 겨우 24명으로 출발했지만 ‘달러로 월급을 준다’는 말이 돌 정도로 대우를 잘해줬다. 외국인과 회의를 하고, 영어 보고서도 써야 하므로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좋은 인재들이 많이 왔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인 전광우씨도 개발금융에 입사한 뒤 유학을 간 경우다.

 개발금융은 정부 지분이 전혀 없이 민간과 외국인 주주로만 구성됐다. 그렇다 보니 정부가 대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나라 금융 역사에서 시장원리에 따라 자율적인 자금 배분이 이뤄진 첫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출발이 다른 은행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개발금융은 단순히 기업 대출만 한 게 아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선보이며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투자은행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전환사채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전주제지로부터 2억50000만원어치의 전환사채를 인수한 뒤, 처음으로 전환권을 행사했다. 전주제지에 감사를 파견하는 등 의미 있는 주주 역할을 했다.

 당시엔 기업도 전환사채가 뭔지 잘 몰랐다. 급하니까 일단 전환사채를 발행했다가 낭패를 본 기업인들도 있었다. 한 번은 전환사채를 발행했던 기업에 개발금융이 주식 전환을 청구하자 해당 기업인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김진형 사장에게 선물을 놓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다발이었다.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자신의 지분율이 떨어져 큰일 나겠다 싶어서 뒤늦게 허둥지둥 달려온 것이다. 김 사장이 나를 불렀다. “이것을 갖다 돌려주고, 전환사채는 없던 일로 하자.” 전환권을 행사하지 않고 전환사채를 대출로 돌려줬다. 전환사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시절의 해프닝이다.

 미래의 성장산업 발굴도 한국개발금융의 주요 역할이었다. 1970년대 초 원양어업과 해운업은 은행권에서 소외돼 있었다. 선박을 사는 데 막대한 돈을 들였지만 영업이 신통치 않아 많은 회사가 빚더미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우린 다르게 봤다. 경제가 연간 10% 안팎의 고속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에서 장차 가장 번창할 사업이 원양어업과 물류수송업이라고 판단했다. 원양어선과 수송선박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개발금융이 직접 지원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기업들은 회계처리가 제대로 안 돼 있어 재무제표를 믿고 대출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업계 사정에 정통한 기업인을 찾다가 알게 된 인물이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1970년 수산대학교를 나와 고려원양에서 원양어선 선장을 하면서 원양어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기업가가 돼서도 그는 어디서 사고가 났다고 하면 ‘이렇게 하라’고 직접 지시할 정도로 속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누군가가 원양어업이나 해운업을 한다며 사업자금을 신청하면 김재철 회장을 찾아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지금도 김 회장과는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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